로마한인교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달이다. 시대의 변화 때문인지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신문에서 언급하는 대로 노인은 늘어가고 있고 상대적으로 어린이들은 줄고 있다고 하고,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 면에서 하락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고 해도 작품이 다작일 때 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로 요즈음은 효도란 명사는 캐캐 묵은 단어요, 60~70년대 영화에서나 그 명맥을 찾아볼 수 있는 단어쯤으로 기억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부모 공경은 땅에서 잘되고 복을 받는 길임을 말씀한다. 공경하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저주를 선포한다. 그런 자는 살아갈 의미와 목적이 없는 인생이라는 말씀이다. 잠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그런데 성경에 자녀의 공경을 받는 아름다운 정경이 있다. 창세기 48장에, 믿음의 조상 야곱에 대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들 요셉의 초청을 받고 애굽으로 거처를 옮긴 야곱은 거기서 17년을 살았고 세상을 떠나야 할 시점을 맞았다. 요셉은 아버지가 떠나실 것 같다는 기별을 받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부탁드렸다. 요셉은 제국의 실세 총리이었기에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선지자인 아버지의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믿었기에 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간청드렸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영성을 대단하게 여겼다.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는, 어쩌면 뒷방 늙은이 같은 상황의 아버지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적 안목이 있었던 요셉은 아버지의 영적 질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인지하였기에 자신의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영성을 물려받고 싶어 했다. 놀라운 것은 아들들이 많았으나 야곱의 축복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는 요셉 한 사람밖에 없었다.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삭막한 시대라 해도 아버지가 영적으로 탁월할 때, 자녀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지상에서 마지막일 수 있는 아버지께 존경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절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쩌면 요셉은 화려한 관복을 차려입었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고 거동도 불편한 늙은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화려한 관복을 입은 애굽의 실세 총리가 큰절을 올리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보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일어나 침대에 앉은 아버지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다가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이끌어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드렸고, 왼손을 이끌어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드렸다. 그러자 요셉이 얹어 드린 두 손을 엇바꾸는 것이었다. 그런 자세는 아버지에게는 불편했다. 두 팔을 엑스 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당황했다. 그래서 만류했다. 아버지, 그리하지 마소서, 오른손을 장자의 머리에 얹으소서. 그때, 야곱은 시퍼렇게 눈을 뜬 사람처럼 외쳤다.“나도 안다, 나도 안다.” 안다는 말씀은 표피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영역까지 알고 있다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이처럼 야곱은 운명하는 순간까지 영적으로 대단했다. 최상의 여유를 누리는 애굽의 삶에서도 영적 진보에 게으르지 않았다. 야곱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마지막 순간을 생략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야곱의 마지막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효도를 바라기 전에 영적충만이 우선임을 교훈하시는 의도가 아닐까?
chiesadiroma@daum.net
05.1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