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한인교회
사람은 하루에 6만 번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수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관리하느냐는 중요하다. 세상에서 막강한 지위에 있는 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전쟁의 영웅 시이저의 아내는 그가 암살당하기 전날 밤에 꿈자리가 굉장히 심란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는 남편을 배웅하면서 지난밤에 꿈자리가 좋지 않았으니 조심하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경호원 없이 원로원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던 중 인사하는 척 다가온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물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제 밀비오 다리를 방문했다. 그 다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게 했던 현장이다. 즉 이곳에서 전투에 승리함으로 250년 동안을 억압했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멈추게 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황제 막센튜스와 게르만 장벽을 책임 진 황제 콘스탄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수적으로 콘스탄틴 황제는 절대적 열세였다. 막센튜스는 18만5천 명이었고, 콘스탄틴은 5만 명의 군사를 대동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의 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더구나 막센튜스는 로마의 황제였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전쟁 전날 밤에 콘스탄틴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도 몰살당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섬기는 태양신(미트라)에게 도와 달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중, 이 기를 가지고 싸우라는 놀라운 환상(꿈)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어로 그리스투스라는 머리글자였다. 이튿날 그는 크리스투스라는 기를 만들어 전투에서 그 기를 앞세우게 했다.
첫날은 탐색전이라 승패 없이 끝났다. 그러나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였음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밀비오 다리를 배경으로 포진하고 있던 막센튜스 황제는 돌연 명령하기를 다리를 건너가서 테베레강을 전면에 두고 진지를 형성하라고 했다. 마치 6,25전쟁 시 낙동강 전투에서 우리 군과 유엔군이 강을 앞에 두고 공산군을 상대했던 전술처럼 말이다.
그런 오판을 왜 했는지 모른다. 절대적 수적 우위에서 말이다. 그런데 당시의 다리를 현재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다리의 길이가 170여 미터고 폭은 7미터가 채 안 된다는 점이다. 그 많은 군대가 한꺼번에 후퇴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비좁은 다리라는 점이다. 그런 비좁은 다리로 18만 5천명의 군대가 급하게 적의 면전에서 건너간다는 것은 엄청난 시행착오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 바보 같은 명령을 내렸을까?
적 앞에서 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은 일종의 후퇴다. 똥개 앞에서도 도망가면 물려고 공격하는 데 하물며 치열한 전투에서야 얼마나 더할까? 결국 그 좁은 다리를 서로 먼저 건너가기 위해 병사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막센튜스 군에는 말을 탄 기병들이 1만 5천 명이나 있었다.
저들은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좁은 다리의 난간이 무너져 내렸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완전 무장한 채로 강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다리에서 강물은 몇십 미터에 이르는 높이었다. 그런 중에 황제 막센튜스도 강물에 빠져버렸고 무장한 무게로 인해 허우적거리고 나오지 못했다. 이렇게 전쟁은 허무하게 끝나게 되었다.
치열한 전쟁을 예상하여 승리가 어렵겠다고 여겼던 콘스탄틴에게는 놀라운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치열한 경기에서 기권승을 얻은 것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승리를 통하여 이제껏 섬겨오던 태양신으로부터 180도 돌아선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급기야 313년, 당시 동 로마 수도였던 밀라노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위한 칙령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매일처럼 찾아오는 수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문제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 고로 우리는 매순간 오판하지 않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지금 푸틴이 핵을 사용하려는 오판에 나서지 않기를 기도한다.
chiesadiroma@daum.net
06.2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