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꼭짓점은 영혼의 문제다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오늘도 신문이나 방송은 주가의 어떤 종목이 올랐고 어떤 것이 내렸다는 뉴스로 가득하다. 또는 대기업의 회장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려고 출국했고,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것이라는 어찌 보면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내용들이다.

현대인들이 이처럼 오늘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간파한 매체들은 항상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건강과 행복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일까? 행여 우리는 세상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세상에서 행복하고 평안함을 누리는 인생이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시편 73편에도 언급하고 있듯이, 어떤 사람은 평생을 병치레 없이 살고, 재산도 넉넉하고, 자녀들은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도 잘하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결혼도 잘한다. 부모님의 생신에는 모든 자녀와 손주들이 참석하여 시끌벅적하고 동네 사람들이 복된 가정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죽을 때도 평안함을 누린다. 즉 건강하게 살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어느 날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자 각지에 살던 가족들이 모두 병상에 참석하여 위로하는 중에 둘러선 모든 사람에게 우애 있게 잘 지내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복된 죽음일까? 그의 장례식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모든 사람이 그의 삶은 정말 복되었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할 것이다. 그런 삶은 만 명 중에 한 사람, 아니 십만 중에 한 사람 있을까 싶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가족과 친지들의 축하를 받고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의 영혼을 기다리는 곳이 음부였다면 신학적으로 그는 행복한 인생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오히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려고 안간힘을 썼던 나사로는 비참한 인생으로 치부되었다. 피부병으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고, 그 몸에서 흘리는 진물을 개들이 핥을 정도이었기에 인간적으로 볼 때 지독하게 불행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부자와 나사로가 죽었는데,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부자는 음부의 불구덩이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낙원으로 들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시간이 되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는다. 이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라는 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은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가보면 죽은 자가 내세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해 놓았다. 그뿐인가? 우리의 전통적 제사나 불교의 윤회 사상도 역시 영혼의 영원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성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덜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다. 이 땅에서는 70-80으로 끝나는 삶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기에 거기에 중요성을 두는 삶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땅값이 오르고 아파트가 오른다는 사실에만 귀를 기울인다. 또는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한자리할 수 있다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진정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추억의 잔재로만 남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관계된 문제는 미래의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문제다. 그리고 실제적인 문제다. 그런데 왜 그 부분을 우리는 소홀히 하는 것일까? 극적으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한 한편 강도야말로 영혼에 대해서 만큼은 성공한 인생일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영혼에 대한 문제요,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문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야 음부에서 고통 중에 울부짖었던 부자의 삶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꼭짓점, 그것은 영혼의 문제다.

chiesadiroma@daum.net

0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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