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한인교회
카톡을 열었다. 후배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몇 년 전 베를린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함께 말틴 루터의 유적지를 순례했었다.
특히 루터가 법대생이었을 때 친구와 함께 부모님을 방문하고 밀밭 사이 길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대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벼락에 순식간에 친구는 죽어버렸다. 대화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놀라운 상황은 루터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공포감에 휘말리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도 모르게 엎드려 한번만 살려주시면 목숨을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은 그를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자리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체험의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고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에서 후배는 해맑은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미래를 약속받은 인생이었기에 항상 웃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후배는 작년에 췌장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동안 방사능 치료를 스물몇 번을 받은 후, 검사를 하고는 수치가 떨어질 줄을 모른다고 카톡에 올 린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동문 카톡 방에 올렸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에 대한 얘기도 나누곤 했었는데 말이다.
그는 여전히 카톡방에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울 줄도 모르고, 또 지우기도 뭣해서 그냥 두었다.
그가 먼저 갔지만, 언젠가는 나도 가겠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 애통하면서, 나는 그에게로 가겠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말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사람, 대단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앞에 죽음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절대로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게 죽음이고,조금 일찍 가거나 늦게 가는 차이 밖에는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달관했다는 듯이 그는 항상 웃기를 즐겨했는지 모른다.
웃음이야 말로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광로 같은 것이다 싶다.
고통도, 슬픔도, 두려움도, 걱정도,
이유는 활짝 웃은 모습은 너무 밝아서 그늘을 조금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크다.
그것은 병상에 있을 때 찾아가서 위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찾아와 위로했던 세 친구들처럼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의 팬데믹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에 방문 계획은 무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카톡을 통해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들을 보노라면 대부분 쾌활하게 웃는 모습이다.
카페를 마시기 위해 가끔 들리는 바(BAR)의 벽면에는 배우들의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다.
현존하는 배우들보다는 세상을 떠난 배우들이 훨씬 많다.
그들은 대부분 활짝 웃고 있다. 후배의 모습처럼,
아마도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인지 모른다.
나도 안다, 나도 세상을 살아보았느니라.
힘들지만 활짝 웃어라.
그것이 고통스러운 표정보다는 낫다.
너의 활짝 웃는 모습에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에,
카톡 사진에서 후배는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선배도 항상 웃어요”라고,서….
chiesadiro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