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이 뜨거운 세상, 사랑으로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

–분노와 파괴, 사랑 없는 인내, 미련스러움–

 

배운 대로의 믿음

 

로마 군대 백부장 집에 한 종이 병들어 앓아눕게 되었다. 그의 병 회복을 위해 백부장이 힘쓰고 애쓰고 마침내 주의 도우심으로 낫게 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의문이 생길 만하다. 종은 당시에 ‘말하는 짐승’에 불과한 도구적 존재인데, 어째서 성경에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족처럼 돌보고 최선을 다했을까? 하는 것이다. 

백부장의 그런 친절과 사랑은 어디서 왔을까? 타고났을까? 그러나 배경이 맞지를 않는다. 이방인이고 헬라 문화와 철학적 사상 속에 자랐을 것이고, 더구나 그의 직업이 군인이라고 할 때, 짐승 취급받던 식민지 종을 가족 같은 사랑으로 돌보아준 것을 어찌 타고난 성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헬라의 철학과 사상은 ‘용기, 힘, 싸움’이 미덕이다. 긍휼, 자비, 사랑은 연약한 자의 자기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한다. 게다가, 군인이면 더욱 혈기왕성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유추할 수 있는 생각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이 이르게 할 수 없는 한 영역이다. 바로 ‘신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로 그가 ‘유대 땅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말씀을 듣고 배우며 하나님을 만나 사랑과 자비를 배웠을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만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게 넘치는 분이시라는 것과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고 할 때, 당연히 그런 처신과 행동이 나타날 것을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받음의 증거

 

한마디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기에, 세상에서 학습되거나 선천적일 수 없는 성품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치의 열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워낙 악하게 변형된 세태를 보고 들으며 학습하다 보면, 이런 지극히 당연한 것도, 의문부호가 따라오는 질문이 되는 것을 본다. 

더구나 성품의 변화라는 성령 받은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열매조차도 기대하기 힘든 이 시대의 종교생활자들을 보노라면, 과연 기독교의 진리, 말씀의 능력, 성령의 감동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큰 의문부호를 가지게 된다.

 

참된 사랑의 제자 

시대와 환경의 조건을 떠나, 우리도 예수를 믿고, 배우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면 당연히 그런 백부장 같은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성품의 변화는 무엇일까?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의 시금석이 되고,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나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랑 없는 오래 참음은 미련한 것이며, 사랑 없는 평화와 온유함은 냉소를 드러낼 따름이며, 사랑 없는 기쁨은 정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보는 위대한 신앙도 있지만, 일상에서 사랑의 향기를 드러내는 신앙만큼 아릅답고 복된 것이 없다.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죽기 전에 세 가지를 깊이 후회한다고 한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나누지 못하고, 더 헌신하지 못한 것을 제일 우선순위로 안타까워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사랑에 뿌리를 둔 열매들이다.

 

사랑많은 교회, 부흥

 

한국에 가서 교회를 방문해 보면, 되는 교회와 부흥하는 교회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세 가지가 유별나더라는 것이다. 기도 소리, 웃음소리가 크고 밥맛이 좋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차고 넘치는 교회에 하나님 나라 부흥의 열매도 풍성하더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교회들에 대한 결론적인 마음은 ‘내가 거기 가서 산다면, 나 같아도 저 교회가서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별다른 특별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싶은 그런 열매들이 아닌가? 그저 단순한 기본적인 신앙인으로서 복된 성품의 열매 혹은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떄문이다.

세상에서는 강한 것을 선이라 하고, 무조건 이기고 보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강하고 잘난 사람은 결국 자기 능력만 의지하다가 무너지고 마는 것을 본다. 반면,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넘어지고 실패해도 주님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 복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앞서 서두에 인용한 백부장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가 진실로 예수 믿고 변화된 성품을 가진 존재였기에, 그 병든 종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였기에, 그 아픈 종을 통해 예수님도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 뜻대로 살면, 손해 보고 억울한 것 같아도 주께서 함께하셔서 마침내 승리의 열매를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

 

선배 목사님 가운데, 최선을 다해 목회를 감당하던 중에 섬기던 교회의 장로 중의 한 분이 설교에 대해 자꾸만 반대의견을 표명하고 설교를 바꿀 것을 자꾸 요청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분란의 일들 없이 조용히 교회를 사임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자녀들이 있고 생활의 염려들을 생각하면, 본인의 목회적 책임이 없는 일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하신 그분의 말씀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목사가 양들과 싸우며 분쟁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설교의 부분에 있어서 타협해야 하는데, 이 또한 목사의 양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교회를 주님께 맡기고 떠나왔는데, 이후에 나타난 결과는 훨씬 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쪽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을 본다. 하나님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 그분을 친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 것이다.        

 

예수님 만난 흔적

 

수많은 일의 열매보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흔적들이 더 중요하다. 그 만남의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맺혀 그 성품에 그리스도의 빛이 나타나게 될 때, 주님이 친히 기뻐하시며 마음껏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에 처음 이민 목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이 오셨다고 한다. 처음 담임 목회를 하면서 많이 놀란 것이, 교회에 너무 분쟁이 많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선언하셨다고 한다. 만약 교회에서 싸우고 분쟁이 나면, 그것은 리더인 자신의 탓이기에 사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결과는 담임목사의 의지와는 달리, 성도들은 그래도 열심히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담임목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렇게 선언했을 때, 비록 분쟁의 연약함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 은혜가 임하더라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변화와 변질, 그 열매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참된 신앙인,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품에 온전한 변화를 맛본 사람이다. 변화가 무엇인가? 씨가 떨어지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지는 그것이 변화이다. 신앙이 변한다는 것은, 점점 변화되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변화되어야 될 때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변질되는 것이다. 변질되면 악취가 난다. 변화 되면 열매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데, 변질 되면 악취가 나서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하지를 못하고, 교회의 부흥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향기나는 열매

 

세상이 어렵고 힘들다. 불같이 뜨겁다. 분노하고, 파괴하고, 참지 못하고, 사랑 없는 인내와 사랑 없는 평화 속에서 냉소와 미련스러움이 자신과 공동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결국, 모두가 무너지고 깨어지며 파괴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이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하는, 이 악하고 질긴 죄의 흔적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더불어, 사랑의 사람으로, 은혜의 사람으로, 온전한 성품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매 순간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며 그 접붙임의 진액들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 흘러들도록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길이 없다. 주께 잘 붙어 있으므로, 그 진액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 좋은 열매, 향기 나는 열매를 맺어가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살아갈 따름이다.

davidnjeon@yahoo.com 

 

10.1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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