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사명 (–물질주의, 개인주의, 혼합주의, 편리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

은혜와 감사, 오직 주님

 

2003년 6월 15일에 교회가 개척되어, 지난주 교회 탄생 21주년 생일잔치를 했다. 한국과 미국 이곳저곳에서 많은 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셨다. 이민 목회 20년에 대해 많은 분이 칭찬하며, 인사말에 내 이름을 자주 언급해 주셨다. 많이 수고했다는 인사였는데, 무척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21년 동안 누가 제일 수고하고 헌신했을까? 아직도 교회의 장로로 남아 수고를 다 하는 개척 멤버들도 있지만, 사람이 받을 칭찬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인생들을 데리고 21년을 함께하신 하나님의 수고 외에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 보면 21년을 한결같이 인도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수고와 헌신(?)에 한마디 고백의 말은 이것뿐인 듯하다. “받은 것은 은혜요, 드릴 것은 감사뿐이라!!”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에 비하면 2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33살 인생의 초년병 같은 시기에 시작된 이민교회의 개척과 그로부터 20년 세월은 쉽지 않은 시간 들로 기억된다. 가끔 누가 묻는다. 어떻게 이민자들이 많지도 않은 곳에서 개척을 하게 되었냐? 조금 우스꽝스러운 답일지 모르지만, ‘어쩌다가’가 정답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었다. 졸업하고 곧 비워 주어야 될 신학교 기숙사 거실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개척을 위한 후원을 단 한 군데도 신청하거나 받지를 않았고, 개척한 후에는 비행기 통학을 1년 동안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매주 왕복했던 것을 보면, 정말 대책 없는 개척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미국교회를 빌려서 교회를 시작하면 새벽기도와 교제와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으니, 미국교회를 들어가지 않고 오피스 빌딩을 렌트해서 시작하게 된 것도, 지나보면 아무 대책이 없는,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를 일이었다. 

 

대책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뭘 모르고 덤비는(?) 대책없는 목사의 친히 대책이 되어 주셨다. 재정적 어려움 없이 사역을 진행하도록 하셨고, 지난 21년 동안 한 교회에서 꾸준히 목회하도록 하셨고, 이민 목회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잠잠히 주안에서 평안을 지켜내게 하셨던 것이다. 작은 도시에서, 지역 이민교회 역사상 아름다운 부흥의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도 하셨다. 우리 교인들은 밖에 나가서 그렇게 말한다. 숫자는 묻지 말라면서, 우리 교회가 알칸사 주에서 제일 큰 교회이고, 도시 가운데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의 남쪽에 교회가 위치하고 있기에 알칸사의 강남교회라고 말을 한다. 한인 인구가 2천 명 뿐이니 숫자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될 일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밖에서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을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서 문제이지, 내가 신앙생활 하는 교회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너무 귀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21년을 한순간처럼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너무 소심하고 유약해서, 조금만 마음 상한 일이 있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다가 잠을 청하기도 했던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한 교회에서 21년간 부족하기 그지없는 종이 목회현장을 지킬 수 있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매의 경중을 떠나 모든 것이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오직 은혜였다. 그리고 그 은혜의 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니, 결국은 주님의 교회를 향한 마음, 교회 마룻바닥 냄새를 너무나 사랑했던 그 작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주셨음인 것 같았다. 이 부분을 생각만 해도, 지금도 뭉클한 눈물이 올라온다. 엄청난 세월을 목회하신 선배님들에 비하면 작은 티끌 같은 일이겠지만, 작은 아이의 마음을 가진 못난 종에게는 21년 세월이 오직 하나의 고백으로 갈무리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은혜요, 드릴 것은 감사뿐이라’ 

 

다시 본질 속으로, 예배회복

 

이제는 눈을 감고 다시 다가올 새로운 20년, 아니 은퇴까지 16년의 세월을 짐작해 본다. 여전히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은혜와 감사’를 바라고 소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친히 대책이 되어 주시는 목회’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면서, 앞으로 미래를 열어감에 있어 현실적인 미혹의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본질을 떠나 현상에 치우친 이 시대의 교회와 신앙인들은 본질로의 개혁과 회복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성경의 본질보다 인본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비신앙적 현상만 추구해 가고 있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많아졌다. 

본질을 떠난 교회와 신앙인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성경의 진리를 거슬리게 되어 총체적 오염과 변질로 빛과 맛을 상실하게 되며 명령하신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성직자가 성직자로서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의 본질적 사명과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나아가 인류 역사는 죄악으로 만연하게 되어 처절한 고통과 좌절의 사건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미래와 문제극복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축복과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특별히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축복 된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다. 인간은 죄악으로 이 모든 존재가치와 정체성을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다시 하나님과 영적 교통하고 경배할 수 있는 존재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본질을 떠난 채, 인본주의적 현상을 추구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성경 중심의 본질로 개혁 회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극복되고 긴장되어야 할 내용 다섯 가지를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이를 회복할 때, 모든 교회의 미래는 주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는 기적의 현장이 될 것이다.

 

1. 물질주의

 

미래교회가 가장 주의할 것이 있다면, 돈을 사랑하는 문제이다.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이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이방 신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알 신은 세상의 신, 물질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한다. 인생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통로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돈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근심도 많아지고, 결국은 돈이 자신을 찔러 죽이는 칼이 될 것을 말씀한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도의 능력도 잃어버리게 된다. 결론은 패망에 이르게 될 따름이다. 돈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결국 돈 때문에 망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면 말씀의 진리도 깨달을 수 없다. 돈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2. 개인주의

 

미래 시대에는 개인주의가 심화 되어 공동체 교회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지금도 전화기 한 대로, 홀로(族)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것을 싫어하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무리와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신다.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홀로 외톨이로 있으면서 은밀하게 예수를 팔아버렸다. 하와는 아담과 떨어져 홀로 있으면서 뱀의 유혹을 받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을 때, 사자의 밥이 되듯이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다. 성경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함께 잘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기에 바쁜 교회가 될 때,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한다. 

 

3. 혼합주의

 

혼합주의 사상을 분별하여 물리치고,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 진리가 예수뿐이냐고 묻는다?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이 이곳뿐인가? 많지 않은가? 라며 항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산에 오를 때만 가능한 이야기일 뿐 천국가는 길과 다르다, 천국은 외길이다. 예수의 길 외에는 천국에 이를 길이 없다. 동성애자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관용과 죄를 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호주의 힐송 처치는 동성애자들이 마음껏 편안하게 예배드리도록 자기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찬양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제한받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지금은 변화의 의지 없이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고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이상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교회 이름이 한자로 참 좋다. 가르칠 교(敎)에 모일 회(會)자를 쓴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진리를 가르쳐, 죄를 분별하여 마침내 삶을 변화시키는 곳이다. 불편해도 가르쳐야 한다. 변화되지 않아도, 변화될 가능성이라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편리주의 

귀차니즘의 시대가 도래했다. 불편한 것을 싫어한다. 굳이 몸을 움직여 교회 갈 필요가 있느냐? 며 인터넷 처치를 선호하고 AI 목사가 등장하는 시대를 환호한다. 앞으로 문명의 발달은 더욱 신앙의 편리 주의를 추구할 것이라 여겨진다. 성경은 말한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몸을 움직여 예배하라고 말한다. 

참 신앙은 영적 게으름과의 전쟁에서 시작된다. 신앙은 편한 것이 아니라 평안함을 은혜 속에 누리는 것이다. 수십 권의 신앙 서적과 수백 편의 말씀 영상보다 운명적으로 연결해주신 로컬처치 예배당의 예배를 소중히 여길 때 하늘의 복을 예비해 주신다. 예수님도 분명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그 장소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은 편하게 하면, 서서히 영이 죽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편리하게 하는 것 아니다. 바쁠 때 실력이 나타나고 훈련되어 자라게 된다.

 

5. 소비자 중심주의 

 

교회 사역을 성도들의 삶의 형편에 맞추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모 교단총회에 오신 강사분들 강연의 대부분이 지금의 세태에 대한 현상적 연구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도표와 자료를 통해 성도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마디로, 성도 없는 교회가 어디 있나? 하는 오늘날의 형편을 반영한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참여한 목사님은 가만히 듣다 보니 본질이 흔들리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를 소비자처럼 여기면서, 소비자를 위한다는 방식으로 교회가 성도들의 형편과 입맛에 맞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려진 것이다. 강의를 들으며 드는 생각이, “그러면 교회는 뭐고? 목회는 뭐고? 목사는 뭐 하는 사람인가? 

그런데 그렇게 모임을 마치고 교회로 다시 돌아와 보니, 다시 은혜의 본질 외에는 답이 없더라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외엔 거룩해질 것이 없고, 인물을 못 만들겠더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소비자 중심. 교인 중심이 아닌 오직 교회 중심, 하나님 중심뿐임을 알아야 한다. 왜 교회 사역이 소비자 중심주의가 되면 안 되나? 교회를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해 보자. 기도한 대로 다 응답받는 게 복인가? 아니면 기도대로 다 응답 안 되는 게 복인가? 성숙한 성도는 후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내 뜻과 형편대로 신앙생활 하는 게 복이 아니다. 힘들어도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할 때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된다.

 

미래교회와 복된 성도

 

교회와 성도는 세상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과 비전을 담아주시고, 하나님 안에서 쓰임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 홀로 족(族)을 지향하는 개인주의, 진리를 왜곡하는 혼합주의, 평안이 아닌 편안을 추구하는 편리 주의, 신앙을 자기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소비자 중심주의를 이기며 마치 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 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사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음을 보게 된다.

davidnjeon@yahoo.com 

 

06.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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