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가 천(千)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强國)을 –고난과 상처, 예배와 교회, 회복과 축복–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

생각과 비전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의 유무에 있다. 단순한 생존의 생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을 말한다. 그래서 꿈도 소망도 없는 막연한 인생은 참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없다. 단순한 생명 연장의 삶, 짐승과 방불한 삶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꿈과 소망이 있다. 이것을 비전이라고 한다. 성령이 임하면, 어린 아이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꿈을 꾸고 노인들은 환상을 본다고 했다. 예언, 꿈, 환상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비전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모두가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할 수 없기에, 모든 성령 받은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의 존재기반

 

성경이 말씀하는 성도의 마땅한 존재 기반이 되는 비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크고 아름다운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나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미리 바라보고 고백하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현실화 시켜 가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도우 시는 신자의  비전이다. 그래서 사람의 크기는 그가 가진 현재적 능력과 조건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씨름하는 비전의 크기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비전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환경이 곤고하고 피폐할수록  비전의 불빛은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비전의 말씀들을 보면, 대부분이 따뜻하고 편안한 온실 속에서 만들어 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온실 속에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말씀에 귀 기울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삶 속에 곤고한 고난의 순간이 찾아왔다 싶으면,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축복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축복의 시간이 찾아왔다고 믿으면 된다. 

 

하나님의 영광, 성도의 기쁨

 

왜 하나님은 인생이 풍요롭고 살만할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때 찾아오셔서  비전을 주시는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 언제 그 영광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는가? 인생이 약하고 부족함에도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며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이다. 인생의 힘이 작용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친히 일하시고 열매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선명한 그 자리에서, 인생은 한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역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늘 기쁨을 추구한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 자신의 기쁨을 너무 추구하고 찾다보면, 인생이 피폐해지고  그 결론도 그렇게 아름답지 못함을 본다. 예를 들어, 마약을 통해 기쁨의 최대치를 구하는 사람들을 보라. 자기 자신의 끝없는 기쁨을 구해보지만, 그 결과는 피폐함 뿐이다. 마약 복용자를 보라. 끝없는 자기 기쁨을 취한다. 그러나 그 끝에는 공허함과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구하고 찾을 때, 인생이 배제되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친히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는 그 자리에서, 피조물인 인생은 최상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비전을 구하고 찾는 법칙

 

 비전을 구하고 찾는 데는 뚜렷한 법칙이 있음을 본다.  비전은 하나님의 음성, 그가 주시는 말씀 가운데 받는 다. 또한 이  비전은 믿음 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믿음에 따른 순종을 필요로 한다. 말씀과 믿음의 순종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열매이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드려야 한다. 오직 주의 음성에 대해 믿음으로만 반응하고, 후진하지 말고 말씀 앞에 직진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그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가장 먼저, 회복을 위한 말씀을 들음이 필요하다.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했다. 기도가 필요하다. 들은 말씀이 믿음과 함께 역사할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다.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작은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도 결코 작지 않음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 한분을 전심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 믿음을 회복할 때, 기적 같은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회복의 중심에 교회와 예배가 있다. 비록 우리가 작고 약할지라도, 몸을 움직여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천지가 개벽을 하여도, 우리는 주의 정한 날, 정한 시간에 주님의 교회 앞으로 몸을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비전을 발견할 때 비로소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의 보는 곳이 달라진다. 땅과 세상과 자신을 향한 묵상들이,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돌려지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충만히 임재하게 된다. 핍절한 삶의 현장이 기적과 간증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회복과 축복의 증거표

 

과거, 한국을 보면 증거표가 될 수 있다. 가난의 보릿고개, 여름 홍수, 태풍 수해 등등으로 집집마다 어둠과 굶주림의 비참함이 있었다. 그런 소망 없던 시대에 복음이 들어왔다. 숱한 박해를 견디고 복음이 전파되어 곳곳 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사람들이 위로받고자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나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해 거룩한 꿈과 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 꿈이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다. 기도와 말씀의 능력이 임하자, 농한기의 투전이나 화투 도박을 내어 버리고 술과 담배를 끊기 시작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서,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 전과 후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품었다고 모든 것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았다. 세상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었다. 말씀과 기도, 교회와 예배중심의 삶을 통해, 사람이 변한 것이다. 여전히 가난한 농부였지만, 그러나 꿈을 꾸는 거룩한 농부가 되었다. 여전히 상놈, 거지, 백정의 신분이었지만, 꿈을 꾸는 거룩한 상놈, 거룩한 거지, 거룩한 백정들이 되었다. 마침내 대를 이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그 꿈이 성취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에 나아왔고,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붙들고 순종했다. 그들의 믿음은 굉장히 단순했다. “교회 와서 예수 믿으면 불행을 이길 수 있다. 예수 믿으면 운명도 바뀐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의 종들이 배출될 신학교를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부흥과 함께 나라도 크게 부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 

 

꿈을 꾸는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 들으며,  비전을 품고 가면 영적회복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삶의 회복이 따라오게 된다. 그런데 그런 회복과 축복의 장이 열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철저히 낮추시는 것을 보고 있다. 내가 가진 것, 자랑하고픈 것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40년 애굽궁전에서의 모세의 많은 학문과 열정은 자신에게는 자랑스러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함에는 오히려 장애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다시 정처 없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굽의 궁전 물이 다 빠질 만큼 초라해졌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드디어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사람, 말씀 들려주시는 사람은 스스로 잘난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스스로 큰 자라고 자랑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버리시고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상 15장의 사울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 가셔서 동족을 구원하라고 사명을 주실 때를 보라. 기드온은 자신의 연약함을 말한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약하고 작으면 군대라도 좋아야 하는데 초라하고 작다고 고백하는 그에게, 단 삼백 명만 데리고 가서 미디안 사람 수만 명과 싸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놀라운 승리로 하나님 당신께는 큰 영광을, 기드온과 삼백용사들에게는 엄청난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승리를 담아주시는 분이시다.

작은 자이고 약한 자라고 무조건 하나님이 쓰시는  비전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비천한 형편에 처한 모든 존재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비천한 형편 중에도 말씀 앞에 서 있는 자들,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 와서 울 수 있는 사람들, 예배가 온전한 사람들,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이들을 사랑해 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동일하신 능력의 하나님

 

최근, 성도들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 실망할 일들이 꽤 생겼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작은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조차 작은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고 연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챤스가 주어질 것임에도, 기대와 소망보다는 낙심과 실망에 앞서는 경우를 본다.

더욱 말씀을 들음이 필요하다.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했다. 더욱 기도가 필요하다. 들은 말씀이 믿음과 함께 역사할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다. 더욱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작은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도 결코 작지 않음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고난 중에 들은 말씀이  비전이 되고, 그  비전이 나의 삶을 끌고 가게 될 때, 반드시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욕심과 야망이 주동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 끌고 갈 때, 마침내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일천강국(一千强國)”의 역사(사 60:22)를 보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0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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