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 성전에 모든 복이 있다(시84:4).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면 어디에서도 복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을 우상화하고 있는 북한을 보라. 하나님을 떠난 나라와 민족이 얼마나 불쌍해지는가를 똑똑히 보게 된다. 영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고 예배가 무너지자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보라.
영국과 유럽의 교회들은 박물관 같은 명소가 되었고, 성전 강대상을 배경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밥을 먹는 구경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유가 복잡하지만 간결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모이지 않고 예배하지 않음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저들을 벌하시고 있음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불행할 따름이다.
볼품없는 뚝배기 같아도
교인들 중에는 쉽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분이시기에, 당연히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다. 그 결과 교회를 경홀히 여기고 마침내 복된 성도의 자리를 벗어나게 된다. 교회와 세상은 비교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시132:13-15).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궁핍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늘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 있는 성도는 성전을 귀히 여기며, 성전을 사랑하며, 기쁨으로 성전에 나아온다. 그리고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한다. 성전 생활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마침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늘 교회에만 붙어 사는 볼품없는 뚝배기 같은 인생처럼 보여도,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존재이다. 주님의 교회에 먼저 쓰임 받는 사람이, 세상 가운데서도 주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는 복을 받고 누리게 될 것이다.
일평생 주의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와 함께 시작되어, 교회와 함께 진행되다가, 교회와 함께 끝나는 삶이다. 실제로, 유아세례로부터 장례예배까지 이루어지는 곳이 교회이다. 어떤 분은 교회가 은혜로와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생명과 구원, 천국과 축복을 바라보는 자들이 나아오는 축복된 곳이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죽기 때문이다.
애굽같은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삶은 죄인으로 사망안에 사는 것이다. 생존이며, 연명하는 시한부 인생에 불과하다. 힘들고 어려운 광야의 삶이어도, 하나님 앞에서 출애굽한 성도의 삶은 참 생명, 새로운 꿈이 있는 삶이다. 영생에 대한 소망과 사랑이 있는 삶, 참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된 자리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복된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전인 교회를 향하고 바라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교회로 피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손대대로 가르쳐 질 때, 자손대대로 예루살렘의 복을 받고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품, 어머니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품이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는 용서가 있고 자비와 사랑이 있다.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요, 축복의 문을 여는 곳이다. 교회는 생명과 구원, 천국과 축복을 바라보는 자들이 나아오며, 들어오고 나가면서 복을 받고 누리는 곳이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죽는다. 삶은 피폐하고 거칠어지며, 결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결실할 수 없는 맹지같은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살기위해서도 교회에 나아와야 한다. 그렇게 주님의 교회에 나아오면, 모든 생명이 살아 역사하게 된다. 온갖 죄악과 저주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며 형통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양육하듯이, 허기지고 고통스런 인생을 따스이 품어주시고 복되게 양육시켜 주실 것이다.
다시, 교회와 예배앞으로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와 예배, 신앙의 사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함이 없기에, 교회와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사상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며, 비록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형편 속에서 가정과 여러 처소 등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드렸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인식하면서 다시 교회로 모이는 본질을 잃지 말고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며, 그렇게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이들을 위하여 능력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예배가 회복되면 다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축복의 원리이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친히 셋팅해 두신 것이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죄를 없이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케 되어 마침내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지고 좋은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 무엇보다도 죄 많은 인생과 죄 없으신 하나님이 만나는 교제, 예배를 먼저 성공해야 한다.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공력을 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을 드려도 되지 않는다. 오직 한가지 예배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배가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이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가 무너지면 복이 없다
예배가 무너지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소통이 단절되었기에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삶에 복이 없다. 그러나 예배가 온전히 드려지고 승리할 때, 인생은 비로소 능력과 권세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된다. 흔히 예배 잘 드리고 집에 가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생의 연약함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에,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지고, 하나님과의 불화가 인생의 불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 승리하면 영적인 눈이 열린다.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과 축복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지혜도 얻게 된다. 유한한 이 땅의 생명,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땅의 시간을 아끼는 복있는 길을 걸어가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지혜가 예배가운데 들어 있다. 교회안에 있다. 교회와 예배를 내려놓고서 어떻게 성도의 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예배중심 본질목회의 회복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예배에 목숨 건 귀한 간증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이런 분들은 오늘날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유명 대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셔도 너무 훌륭하신 지혜를 드러내고 계시는 것을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배는 없어지고 선교, 혹은 교육, 다음세대 등등만 주장하니까 선교도 교육도 어떤 목회적 목표를 이루는 이벤트로 전락해버린 것을 본다. 구제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연말 자선 행사용 사진찍기에 다름이 없다.
결국 그 결과가 무엇인가? 교회의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게 되므로,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은혜가 고갈되면서, 선교지도 자연히 치명적인 어려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면서 허용했던 많은 문화적인 도구들이, 이제는 아이들의 영혼을 새롭게 빚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독소가 된 것을 본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잊어버린 채, 의무감에서 행하던 구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교회의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의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어렵지 않다. 선교도 살아나고, 구제와 전도 교육 모든 것이 풍성해진다. 그러나 예배가 죽어버리면 무엇이든 할 때마다 힘이 든다. 마치 기름칠하지 않은 오래된 기계가 둔탁하게 굴러가는 모습이 되고 만다. 사역의 현장들도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로 말미암아 누리는 관계의 회복, 교제의 풍성함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의 길을 찾고 열어가는 가장 우선순위임을 알고 이를 회복하는 데 최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 없는 사역, 예배 없는 헌신은 참 위험하고 피곤한 일이 될 뿐이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예배회복의 목소리가 들려옴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 내용들이 예배 형식의 전환 혹은 문명기기의 활용을 통해, 외려 교회중심 예배의 중요성을 놓쳐버리는 것도 보게 된다. 교회에 나아오지 않아도 되는 예배 스타일이 많이 등장한 것을 본다. 성경적인 예배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교회와 예배로 가까이,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가까이 등등.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많은 은혜의 방편들을 파괴시키는 것도 목도하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한시간, 정한장소의 예배
이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교회의 앞선 이들과 목회자가 죽도록 예배를 사랑하고 예배에 목숨거는 목회, 예배드리는 거룩한 구별된 장소로서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목회, 이것 외에 더 집중하고 열심과 정성을 다할 일은 없음을 깨달아 알면서 초점 맞추어야 한다.
마음과 정성만 있으면 되지, 굳이 몸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핑계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복된 신앙생활은 기준이 분명하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내 몸을 가지고 가서 예배드린다.”는 사상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분명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전의 신앙좋으신 분들을 기억해 보라. 예배생활, 교회생활이 분명한 분들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의 전을 향해 나아와 예배드렸던 분들이다. 이것이 복있는 성도가 취하는 신앙의 정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앙의 본질을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
davidnjeon@yahoo.com
05.18.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