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십자가는 무엇인가? 죽음의 올가미이다. 죽음, 그 자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예수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서 자기의 원하는 바를 성공시키며 이를 자랑하면서 자신이 이렇게 잘난 사람이라는 자기 영광을 누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이름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감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임으로, 예수 안에서 자연스레 노출된 그 참된 승리를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예수 안에서 잘 죽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죽음을 멸망 혹은 끝이라고 하지만, 예수 안에 잘 죽는 것은 이 땅에서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맛보는 통로이며 시발점이 된다. 예수 안에서 그 이름을 위하여 잘 죽으면, 삶에서도 복이 넘친다. 정말 위대한 삶을 살고자 원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는가? 십자가를 알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죽는 만큼 그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살아 역사하는 삶
자신은 죽고. 주님이 살아 역사하는 인생, 얼마나 복 있고 멋진 삶인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세상의 나는 자꾸만 없어지고, 그리스도 그의 영광만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드러난다 할 때에, 그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잘 죽어지는 만큼, 그리스도의 영광이 풍성하게 나타남을 경험하게 된다. 잘 죽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해서, 그래서 실수하고 실패하며, 절제하지 못한 채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삶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마디로 내가 살아 움직이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신앙생활도, 세상의 삶에도 아무런 복을 누리고 얻지 못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을 보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채, 오직 그리스도만 살아 역사하는 삶을 살았다. 위대한 인생을 살았다. 가말리엘 문화에서 학습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그가, 그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며, 예수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어떤 인생보다 존귀하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의 위대함의 비결이 무엇인가? 잘 죽었기 때문이다. 매일 주 안에서 잘 죽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그렇게 죽이므로, 그리스도가 온전히 그에게서 살아 일하시는, 그리스도가 이끄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삶에 만족함이 없는가? 다른 것,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아야 한다. 답은 간단하다. 아직도 제대로 죽지 못해서, 덜 죽어서, 자주 육신의 자아가 살아남으로,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잘 죽으면,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데, 잘 죽지 못하니 주인이 종을 쓰기에 불편하고 힘이 드는 것이다. 부족하면 고쳐 쓰면 되지만, 그것보다는 온전히 십자가에서 먼저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길,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잘 죽는 길이 무엇일까? 주님의 마음으로 충만하면 어렵지 않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제물로 내어 놓으실 만큼, 예수님 자신도 죄악 된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치러진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 예수를 죄인들의 땅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직접적인 동기가 이런 사랑, 죄인들을 위한 극한 사랑이 이유가 되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 사역의 동기도 역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그 마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완결인 십자가도 역시 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과 영생을 안겨 주기 위한 값진 고귀한 희생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의 삶”으로 초청하기를 원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가 선생이고 주인이 되신다. 그래서 주의 종된 이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명령하심에 순종하고 따름을 마땅한 일로 여겨야 한다.
어떻게 주님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인가? 주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위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는 것이다. 주님 사랑하면, 아까울 것도, 미련둘 것도, 마음 둘 곳도, 세상의 유혹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하면 모든 것에서 나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본전 생각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가게 될 것이다.
십자가 사랑, 그 열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사랑을 말씀하셨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이웃에 대해서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뜻을 다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대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네 마음의 모든 사랑으로 하라는 것이다. 남는 것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면서 주님도 사랑해보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찬 그런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적당하게 하지 말고, 힘을 다 쏟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그 결과, 열매는 무엇인가? 보상을 말함이 아니라, 그렇게 죽도록 사랑하면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될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면, 이분은 연세가 꽤 되신 분이실 것이다. 성경은 사랑을 죽음같이 강한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면 내 것이 내것 되지를 않는다. 신비롭다. 아까울 것이 없어진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는 사랑이 이런 것이다.
이런 온전한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열매는 무엇인가? 전적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헌신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초월해서 모든 것을 주님께 올인하는 헌신이 가능해진다. 사랑의 힘이요, 열매가 그러하다. 사랑을 통해 자신의 욕심과 기대감을 채운다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것조차 넘어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참된 헌신이 불이 붙듯이 가능해지고, 그 헌신을 통해 유한하고 부족한 인생이었던 자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고 경험하는 멋진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생각해 보라,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종들에게, 주인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주인의 전부를 맡기게 된다. 요셉에게 모든 가정 대소사를 맡긴 보디발의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전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기에는 본전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열매, 땅의 축복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으로 섬기며 사랑하게 될 때, 주님 앞에 온전한 헌신이 가능해진다. 그 헌신을 통해 인생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그 열매의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땅에서도 신앙생활 잘하므로 맛보고 누리는 복이 있다. 예수 믿고 손해 보는 것이 없으며, 예수 믿음은 인생 최고의 투자(?)이며, 에수 믿음은 인생의 허무와 후회를 막아내는 유일한 축복의 통로가 된다. 최고의 축복이 예수 믿는 것, 예수를 사랑하는 것, 예수를 사랑함으로 불같은 헌신을 드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병 간호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하면서 귀한 목사님을 만났다. 모친이 계시는 누님가정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셨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삼 남매를 두었는데, 집집마다 게스트 룸이 아니라 방 한 칸을 따로 마련해서 침대와 책상과 TV를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친은 언제라도 가방하나만 달랑 들고 오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여든이 넘은 노인분이 이렇게 영적인 권세의 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아주 단순명료한 답을 얻었다고 한다. 어머니만큼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지독하게 예수를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권세를 더하셔서, 그런 복을 누리게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 결론이 아주 독특했다. “세상 어디를 가 봐도, 예수는 누굴 위해 희생하고 믿어 주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을 위해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고부간의 갈등,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많지만, 한 가지 그 예수를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잘 섬긴다면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땅에서도 넉넉한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십자가의 최종열매, 부활
그 목사님의 간증뿐이겠는가? 십자가에서 잘 죽고, 온전한 헌신을 드리면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우리의 쓸것과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축복이 있다. 최고의 축복이 무엇일까? 이 땅에서 권세 있게, 강단 있게 살아가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장차 맞닥뜨려 경험할 부활의 영광과 그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 아니다.
부활의 영광은 비교불가이다. 십자가의 궁극적인 열매, 부활의 영광을 지금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어떤 삶의 고통스런 문제들 앞에서도 결코 지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삶이 될 것이다. 부활의 영광과 기쁨은, 이 땅에서 간절히 찾고 구하는 그 어떤 인생의 자랑거리에 대해서도 자유케 될 것이며, 마침내 실제적인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면서부터는, 엄청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한 자로 최고의 낙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한국 세계로 교회, 손현보 목사님과의 만남이 기억난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어려워하던 때였는데, 고기를 구우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먼저 물어보았다. “목사님, 힘들지 않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정부와 싸운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목사님의 답변이 멋있었다. “목사님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건데.” 그렇게 죽기 살기로 예배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한 끝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한 복을 주셨다.
코로나 이전보다, 그 이후가 훨씬 더 힘 있게 하나님께서 그 사역의 장을 열어주셨다. 죽기를 각오하니, 죽는 게 아니라 더한 많은 것이 생명의 열매로 드러난 것이었다. 어찌하면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죽을 수 있을까? 부활의 주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결국, 한번 지나가는 죽음의 일들 앞에서도 호들갑 떨지 않고, 당연한 듯 담대한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이 된다. 이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잘 죽게 될 때, 부활의 영광에 참예한 자가 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참 귀하고 복된 열매를 얻고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잘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davidnjeon@yahoo.com
03.3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