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 참된 회복 Worship & Education 4

–세상, 출애굽 성도, 항상 교회-
전남수 목사

땅에 속한 허망함

 

인생에 진정한 복이 있는가? 푸른 잔디에 수영장을 가진 하얀집을 소원했던 분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수영장은 메꾸어서 상추밭을 만들고, 집앞 잔디밭은 귀찮은 나머지 돌길을 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을 사면 행복할 것 같아도, 살다 보면 그냥 집에 불과한 것이 이 땅의 한계있는 복의 모습이다. 인생에 완전한 만족,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은 없다.

오래전,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할 때에, 탈출하려고 철조망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미군의 손을 잡아 세계 이곳 저곳으로 보내어졌다. 그러나 결국 그 삶이 그 삶이더라는 것이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미국이라고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섬기는 청교도의 신앙아래 그 질서가 유지되어 깊은 뿌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지만, 외로운 이민자의 삶에 깊이 탄식하는 이들도 많다.

북한 사람들이 남쪽으로 탈출했는데, 많은 사람이 알콜 중독에 빠졌다고 한다. 남한이 낙원인줄 알았는데, 고향 떠난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술이 그들의 꿈을 삼켜버린 것이다. 이 땅 가운데서 절로 영혼의 만족과 평안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저들 가운데도 탈북을 넘어서 주님께로, 주님의 교회로 피한 이들에게는 영생의 복을 누리는 가운데, 삶의 형통함이 따라오는 감사가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 좋아도 한때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터전인 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 세상이 좋아도 한때다. 반드시 주의 몸된 교회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구약의 야곱을 보면, 하나님 없이 푸른 초장에 장막과 우릿간을 짓고 형통한 줄 알았다. 그러나 한때였다. 그의 가정을 보면 도저히 믿는 사람, 믿음의 조상에 속한 가문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적당히 세상과 섞어 사는 신앙생활은 잘 사는 듯 보여도, 형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야곱이 살던 세겜은 충분히 살기 좋아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불통한 생활터였다. 하나님의 약속도, 예배도, 기도도 없던 곳이었다. 결국, 큰 시험과 환란이 찾아왔고, 훗날 그의 130년 삶을 가르켜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허무한 시절, 후회막심한 시기를 보낸 때였다. 그러나 그런 야곱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아버지의 집, 벧엘로 올라갔을 때 비로소 영혼의 숨통이 트여지므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벧엘, 하나님의 집이 어디인가? 주님의 교회이다.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에 나아오면 소망이 있다. 소망은 생명이다. 교회에 생명의 근본되신 주님이 계시기에, 생명이 역사하는 곳이기에, 어떤 죄악과 저주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싹이 돋아나게 된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며 형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참된 형통, 은혜 가운데 낙심과 피곤을 넘어서는 영혼의 만족함이 멈추지 않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성전, 주님의 교회, 축복

 

이스라엘의 축복은 성전의 축복이었다. 하나님께서 세계 인류가운데 유대인에게만 성전을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피 흘려 십자가에 단번에 드린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성전 시대를 열어주셨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마다, 성경에 약속한 성전의 복을 받게 되었다. 성전에 모든 복이 있다. 주님의 교회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샘이 솟아오른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이곳에서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찾아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를 부모가 찾고 찾아서 찾아오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세상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나를 주의 성전으로 불러주셨기에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과 긍휼을 덧입게 된 것이다. 

 

교회를 통해 복 주심     

 

하나님은 성전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시다.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을 것도 주고, 입을 자색 옷도 주고, 가락지를 끼워 아들의 권세도 회복시켜 주었다. 신도 신겨주고 기뻐하며 잔치도 베풀어주었다. 그 아버지의 집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오늘날 주님의 교회의 모형이며, 실제이다. 교회를 통해 그의 돌아온 탕자같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교회로 오기만 해도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만나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자녀삼아 주시고, 모든 인생의 일들, 전 삶을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면 어디에서도 복을 받을 수 없다. 이 땅의 수많은 민족들이 잘살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고 빌어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교회에 팔려나가던 영국을 보라, 공산 볼세비키 혁명으로 무너져내린 러시아를 보라, 교회와 선교사님들을 핍박하는 중국을 보라,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우상을 세운 북한을 보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복을 빌면 잘 될 것 같지만, 결국 안되는 것이다.

교인들 중에는, 교회안이나 밖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 결과, 교회를 경홀히 여기게 된다. 하늘과 땅을 비교할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을 비교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다. 그래서 복된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며, 주의 성전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 안에 살며, 성전에 뿌리를 내리고, 성전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주의 성전으로 출애굽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출애굽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기회를 얻어 애굽을 탈출한 사건이다. 죄악의 땅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애굽이다. 육에 속한 저주의 땅을 떠나, 신령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애굽이다. 고단하고 소망없는 바로의 무거운 쇠사슬을 벗고, 하나님 자녀로서 믿음과 소망과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출애굽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속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예배와 성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애굽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애굽의 익숙한 삶에서 오직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만 가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애굽은 누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하고 순종하면, 주의 말씀과 성령이 인도하여 가실 것이다. 다윗과 같이 누가 자기에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시122:1)고 말할 때에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야 한다. 그때 다윗의 예배장소는 솔로몬 성전과 같이 화려한 곳이 아니었다. 천막으로 지은 성막이었다. 그럼에도 궁중에 살면서도, 그 천막 교회를 궁궐의 천날보다 더 사랑한 것이 다윗이었다.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한 복을 주신 이가 다윗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의 성전에 거하는 복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와 함께 시작되어, 교회와 함께 진행되다가, 교회와 함께 끝나는 삶이다. 실제로, 유아세례로부터 장례예배까지 이루어지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 나아옴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주셨고 불러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며 천국을 향하여 충성하다가, 교회 안에서 그 생애를 마침으로 천국에 가게 된다.

어떤 분은 교회가 은혜로 와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재미나 친분 관계 때문에 나오는 곳도 아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어도, 결국 교회 나오는 이유는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으려고 나아오는 곳이다. 교회는 생명과 구원, 천국과 축복을 바라보는 자들이 나아오는 곳이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죽기 때문이다. 

애굽같은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삶은 죄인으로 사망안에서 사는 것이다. 생존이며, 연명하는 시한부 인생에 불과하다. 그 삶에는 절망과 근심, 미움과 시기만 존재할 따름이다. 왜 그러한가? 영생이 없으므로,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육체의 생명만을 생각하니 물질적이 되고, 조급하고 답답하고 허무한 삶으로 귀결된다. 죽음의 삶을 연습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나 출애굽한 성도의 삶은 참 생명, 새로운 꿈이 있는 삶이다. 영생에 대한 소망과 사랑이 있는 삶, 참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삶 속에 항상 교회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한가운데는 항상 교회가 있다. 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축복된 신앙인의 삶의 내용물이다. 항상 주님의 전인 교회를 향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교회로 피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시편 27편 4절의 다윗의 소원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davidnjeon@yahoo.com 

03.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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