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지키게 하라

–혼합과 혼돈, 선택과 결단, 순종과 은혜-
전남수 목사

영토전쟁, 신앙전쟁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유언을 들어보면, 그 말들이 아주 단순하고 간결한 것을 본다.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이야기를 생략한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의 유언은 한결같이 ‘하나님 제일주의, 오직 하나님’에 집중된 것을 본다. 일평생 사랑하고 섬긴 그 하나님, 그분 한분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만복의 근원됨을 말하는 것이다. 가까운 어르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유언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얘들아 예수 잘 믿어라! 예배 잘 드려라! 교회 빠지지 마라! 주의 종을 잘 섬겨라!” 그것 외에 다른 말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이라고 할 때, 꽤 할 말이 많았을 텐데, 왜 그렇게 단순하고 심각하게 하나님만 강조했을까? 아마도, 평생의 삶을 통해 깨닫고 안 것이 이것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마음 뺏기지 않고 온전히 승리할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몸으로 체험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로 땅에서의 삶을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인생을 살고 나니, 그것이 아님을 배웠던 것이다. 마치, 여호수아가 「영토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비교불가로 진정한 승리를 결판 짓는 「신앙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손들에게 당부한 것을 보면 더욱 이해가 된다.

 

신앙과 선택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말씀순종과 은혜를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말씀앞에서 끊임없는 결단과 선택, 그 결과들이다. 결단과 선택의 핵심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순종하며 요단강에 발을 들였을 때, 여리고성을 13바퀴 뱅뱅 돌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놀라운 승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아간의 범죄함과 같은 불순종의 일들이 나타났을 때, 저들 공동체는 큰 어려움과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호수아 당시의 사건 뿐 아니라, 성경전체에 흐르는 한 가지 축복의 길, 승리의 길이 무엇인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같은 순종의 삶을 통해 축복의 열매를 맺어갔음을 본다. 그런데 이러한 순종은 결코 관념적인 용어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드리는 순종도 모리아산을 향해 몸을 움직여 나아감으로 주어진 것이다. 요단강이 갈라지는 일도, 저절로 되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을 요단강에 내어 디딤으로 되어졌다. 가나안 족속들이 절로 항복하며 이스라엘에게 나아온 것이 아니었다. 칼을 들고 순종하며 열심히 전쟁을 행함으로 받은 순종의 결과였다. 

 

순종과 은혜 

 

이처럼 순종을 통해 귀한 열매를 보게 되는데, 이러한 불같은 축복의 순종을 잘 드리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손과 발을 움직이는 행함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동기와 의지, 열심히 저들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손과 발을 움직이게 만드는 이러한 에너지(?)는 모두 영적인 것들이다. 밥의 힘만 믿고서, 밥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영적 자극의 중심에, 그 에너지를 만드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110세 파란만장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구구절절 아브라함의 부르심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역사(His Story)를 언제나 말한다. 그외 믿음의 조상들과 다윗, 바울 등 모든 신앙의 위인들의 유언의 중심가운데 드러나는 특징 중에 하나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들이다. 결코, 자기자랑이 없다.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강조한다. 왜 그런가? 참된 순종을 통해 열매를 보게 되는 데, 그 모든 순종을 가능하게 만들고, 순종 이후의 축복이 교만의 조건이 되지 않을 가장 확실한 것이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하늘로 머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은혜의 관점으로 볼 수 있음은 삶의 승리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일이다. 이 땅은 우리 힘과 뜻으로 얻은 땅이 아니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무능함을 뛰어넘어 이루신 역사의 현장임을 늘 기억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땅의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진실될 때, 이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더욱 귀한 것으로 축복해 주신다. 그래서 참 지혜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부르심과 그의 일하심, 그 결과로 자신이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항상 고백하며 잊지 않는다. 

사람은 머리를 하늘로 두르고 사는 존재이다. 짐승이 땅에 머리를 숙이고 사는 존재라면, 사람은 하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만큼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은 잊어도 좋은것은 안 잊고, 잊어도 좋을 것은 꼭 기억하는 죄의 습관을 가지고 어리석게 살아간다. 

 

기독교의 역사, 영적선택

 

기독교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이다. 선택에 따라 한 사람 개인의 일생(一生)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주변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을 본다. 한 사람의 선택, 한 사람의 결단, 한 사람의 순종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미국 땅을 보라. 미국만큼 모든 게 갖춰진 데가 없다. 시골 어디를 가도 호텔이나 모든 생활여건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다. 그 바탕가운데 교회를 중심한 미국의 청교도 조상들과 그들의 믿음과 순종, 은혜에 대한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전 유럽에서 배가 각기 다른 목적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남아메리카로 가는 배가 있었고 북 아메리카로 오는 배가 있었다. 남아메리카로 가는 배들은 황금을 찾기위해 가는 배들이었다. 그들은 황금을 찾았다. 그러나 지금 저들의 삶의 결론은 피폐하기 짝이 없다. 마약전쟁의 소문이 많고, 그냥 북미의 선교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북미로의 목숨 건 탈출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북미로 오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1984년도에 LA 올림픽을 TV로 본 기억이 있다. 올림픽 식전 행사에 미국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교회를 세우고, 다음으로 학교를 세우고 그 다음으로 자기 집을 지었다.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할까? 그때 우리 담임목사님은 그것을 가지고 몇 달을 이야기 했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이 왜 미국을 축복하는 지 아느냐? 그러시면서 교회를 사랑해라, 예배 잘 드려라, 하나님 잘 섬겨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게 설교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영적인 승리를 위한 신앙의 선택, 먹고 사는 문제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섬길 줄 아는 저들의 선택에 복을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앞에서 영적인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 교회, 예배를 빼놓고서,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축복도 결코 생각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의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본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기본이 무너져 있으면, 결코 축복의 가정과 가문, 나라와 민족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혼합주의, 분별력

 

신앙의 기본인 예배도 선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정해야 한다. 신앙은 중간지대가 없다.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 적당한 것은 없다. 빛과 어둠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 회색은 불신앙이다. 사람들은 적당한 것 없는 지를 질문한다. 배경이 혼합주의 경향이다. 영적으로 섞는 것은 무엇이든 좋지 않다. 

오늘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영적 선택의 분별력이 결여된 것을 본다. 유명한 신부의 강의를 듣고 은혜받았다고 자랑한다. 즉문 즉답을 하는 유명한 스님 설법을 듣고 은혜가 된다고 들어보라고 전도(?)를 한다. 그러다가 또 어느 때애는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라고 난리한다. 뒤죽박죽이다. 온전히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분별력이 결여된 결과이다.

 

뜻을 정하여, 선택과 결단 

 

예배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해서 드리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선택과 결단의 열매이다. 성실함이 바탕이 된다. 어떤 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성실한 사랑이다. 한결같은 사랑이다. 사랑에 빠질 때만, 가슴이 뜨거울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항상>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항상 사랑할 수 있을까? 계속적인 선택과 결단의 과정을 지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30년 전쟁을 치룬 후에, 땅의 분배를 마쳤다. 이제 살기만 하면 된다. 정착생활의 기본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후손들에게 거듭 거듭 몸부림치며 하는 말이 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겠다. 너희도 나처럼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왜 하필, 오늘, 나와 내 집인가? 참된 신앙, 하나님 잘 섬기는 신앙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계속적인 결단과 선택으로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 텐트를 폈다 접었다 를 반복하며 40년 세월과 30년 전쟁의 시기를 지나왔다. 여성들의 예를 들면 제대로 메이크업도 못한 채, 살기위해 급하게 지나온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민족들은 어떤가? 광야 노숙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착민 문화를 가꾸어 온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총각들 눈에는 모두가 미스 가나안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신앙도 버리고 저들의 문화를 쫓아갈 것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 신앙을 떠나 가나안의 신들을 섬길 것을 예상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여호수아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매일 매순간 선택과 결단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나안은 잠시 잘못하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곳인 줄 알고, 영적 긴장감 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 것을 여호수아가 유언하며 말한 것이다. 매일 매일을 결단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임을 염려한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교회가 구별이 없어짐을 본다. 성경과 세상의 가르침이 교묘하게 섞어져 나오는 것을 본다. 가장 무서운 것이 전화기와 인터넷 문화이다. 쉽게 많이 세상 앞에 노출되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그것을 선택하고 따라가는 것을 본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 모든 것에서 그런 영향이 드러난다.

어떻게 회복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이 악한 시대가운데서 살아남는 길,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내는 일, 감사와 은혜로 매일 매일이 기쁨으로 사는 길, 달리 길이 없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서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하고도 영적승리를 얻었듯이, 사자 굴에 들어갈 어인이 찍힌 줄을 알고서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의 무릎을 꿇었듯이, 제대로 말씀 앞에 순종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음을 본다.

davidnjeon@yahoo.com 

03.02.2024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