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중심의 교회교육에 대한 열가지 중요한 관점에 대해, 지난 글에 다섯가지 우선적인 것을 언급했다. 예배의 회복을 위해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지킬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교회로 나아옴을 통해 배우기를 권하며, 몸으로 교회에 나아오고 교회의 예배에 몸으로 노출할 것을 강조했었다. 더불어, 모든 교육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고,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가 곧 인생의 성패를 좌우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예배중심의 교회 교육은 비록 교회의 중심된 과제이지만, 철저하게 부모가 먼저 본(本)이 되어야할 무한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마지막으로는 영적 재목(靈材)이 될 목표에 초점을 맞출 것을 언급했다. 영적재목, 영재가 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앙생활, 자녀의 교회생활은 단순히 종교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앞에 쓰임받을 준비를 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교회에 벽돌 한 장이라도 얹을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 나라에 무용(無用)한 존재가 아니라 쓸모있는 일꾼으로 구체적으로 준비되는 교육이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제 금번 글에서는 나머지 다섯가지를 강조함으로 열가지 강조점을 마무리하겠다.
6. 겸손, 내면의 성품훈련
여섯 번째 예배중심의 교회교육의 강조점은 ‘성품훈련, 자세훈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교육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습관이 되어 탁월함에 이르는 것이다. 손흥민 선수를 세계적인 클래스의 선수로 빚어낸 아버지 손웅정 안수집사의 말이 생각난다. 참된 경쟁력은 인성을 갖춘 선수로 평가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인성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을 닮은 인격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겸손, 그의 순종을 배우며, 작게는 인상쓰지 않는 것에서 부터, 친절함과 폼잡지 않는 것까지, 거룩한 잔소리(?)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겸손의 자세’를 강조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자랑이 교만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실패의 길이다. 자랑거리가 주님 안에서 항복하여 겸손으로 변화되지 못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의 존재가 되고, 마침내 그 잘남이 그의 인생을 멸망으로 망치게 되는 것을 본다. 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흥할 사람과 쇠할 사람이 나누어진다. 겸손함이 기준이다. 겸손한 것과 비슷한 것을 찾으면 처세술이다. 자신을 낮추는 척하는 것이다. 오래갈 수 없다. 처세술과 겸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앞에 두렵고 떨리는 회개의 여부이다. 겸손한 사람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러다 한 대 맞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동시에 회개할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것 같지만, 하나님앞에 두려워 떨줄 아는 심령임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자세를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마침내 복을 누리게 하신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는 대목도, 영어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태도(attitude)를 배우라는 것으로 번역한다. 쉬운 성경에서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으로 설명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를 배우고 따르는 것은, 안팎으로 우리의 태도와 행동, 자세가 바뀌고 변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말씀안에서 가르쳐야 한다.
7. 예배자의 자세와 태도
엄격할 정도로 예배자의 자세와 태도를 강조해야 한다. 예배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예배를 배우게 해야 한다. 본 교회에서는 중고등부 아이들을 영어권 예배에 보내지 않는다. 잘 알아듣지 못해서, 동시통역 자막을 스크린에 올리면서까지,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한다. 거룩한 잔소리가 많아진다. 부모세대와 함께 예배하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다리 꼬지 말라. 팔짱하지 말라. 아멘 해라. 찬양은 입을 크게 열고 따라 부르는 것이다. 설교는 이해로 듣는 수업이 아니다. 때가 되면 알아들을 날이 올 것이다. 등등.” 옷 매무새 하나까지도 주의하면서 예배하도록 한다. 찬양팀을 하게 되면 지나치게 주목받는 옷을 입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거룩한 잔소리가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몸으로 배우는 것이 좋다는 것과 마음에 품은 생각이 외부로 드러나는 부분을 절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또한 참된 영성의 훈련이 된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의 삶을 생기 있게 해주며,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믿음의 실천과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바로 영성이기 때문이다. 예배자의 간절함과 참된 영성, 그것은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다.
8. 말씀의 반복과 새김
어려움이 닥칠 때 말씀이 가장 선명한 힘이 된다. 환경에 따라, 호들갑 떨지 않고 더욱 말씀을 붙들면 살아난다. 모든 환난의 때를 지나가는 비결은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말씀의 은혜 외에 달리 답이 없다. 말씀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간구하며 믿음 가운데 잠잠히 나아갈 때, 주께서 모든 것을 복되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 소망과 현재적 삶을 연결하는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한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말씀을 암기하는 것이다. 마음판에 새기고, 뼈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말씀이 그의 영혼을 주님께 붙들어 매게 될 때에, 엄청난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 가정, 가문, 이웃, 교회까지 온전한 변화를 나타내게 됨을 본다.
교회가서 무엇하지요? 라는 물음에 "말씀을 듣지요" 라고 대답한다. 모든 신앙과 삶의 중심에는 말씀이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온전하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존재 의미가 없어지고, 교회에 속한 영혼에 대한 성장과 성숙의 책임도 이루지 못한다. 말씀교육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을 애독하고 암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경을 애독하는 것보다 더 귀한 교육은 없다. 반복이 실력이다. 암기를 목표로 말씀을 심어주는 것은 바위에 발자국을 찍는 것과 같다. 부드럽고 연할 때, 말씀의 불도장을 찍도록 훈련을 하면, 마침내 건강한 자녀들로서 자라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9. 드림의 훈련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는 마땅한 사명과 의무가 존재한다. 물질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신 물질은, 내게 주어진 사명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질을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자기 임의대로 사용하게 될 때, 그것은 곧 사명의 포기가 되며, 사명에 담긴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사명의 포기는 곧 축복의 포기를 의미한다. 사명이 있음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예비된 상급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부재(不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사명과 책임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승리하는 성도는 반드시 주의 교회와 복음의 요구에 대해 피 같은 물질뿐 아니라, 생명까지 바쳐 충성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의 생명까지도 드리는 존재는 하나님앞에서 복있는 모습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예물드림을 잘 가르쳐야 된다. 욥이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듯이, 자녀들도 자신의 제물을 가지고 드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대학생이 되어도, 스타벅스 커피보다 못하게 하나님께 헌금생활하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부모와 교회가 어릴 때부터 잘못 가르친 탓이다. 대부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알고나면 잘 순종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앞에 인색하면 그 미래가 복되지 못하다. 특별히 하나님께 드리는 자는, 그 마음에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도 열심인 것을 본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비슷한 아이들이 함께 그룹을 만드는 것을 본다. 서로 윈윈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하시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10. 변화에 대한 믿음
교육의 목표는 ‘사람의 변화’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변화의 능력이다. 사람 참 바뀌지 않는다고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 약해진 것이 아니다. 본질은 과연 예수를 제대로 믿었느냐?를 질문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앙생활 가운데서 어려운 문제만 닥치면,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안되냐?’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문제이다. 예수 이름을 제대로 믿고 배우므로, 그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람 그 자체를 믿기 어렵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성경의 말을 들으면 된다. 인생이 저절로 변할 가능성은 없지만, 예수안에서 매일 매일 말씀과 성령의 가르침안에서 변할 수 있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카멜레온 같은 변색되는 것이 아닌,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믿어야 한다. 구한말 선교사들의 모토가 있었다고 한다. ‘복음은 사람을 바꾼다. 사람을 바꾸면 민족이 바뀐다.’ 그래서 선교의 열풍이 불었고, 마침내 복음이 사람을 바꾸어 놓았고, 나라와 민족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3.1 운동 독립선언문을 주동한 3분의 1이 예수믿는 사람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구미 상모교회 새벽기도 종소리가 민족을 깨웠다. 예수 이름의 그 능력이 개인, 가정, 가문, 자손, 교회, 나라와 민족을 바꾸는 능력이 된 것이다. 이것을 믿을 때, 변화를 위한 교회 교육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11. 전세대 통합교육
가정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녀교육에 우선순위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교회 교육도 당연히 교회 내 다음세대(Next Generation)에 대한 관심과 배려, 재정을 집중하게 된다. 미래를 기대하는 귀하고 복된 관점이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 원리를 찾아본다면, 정말 다음 세대를 위한다면, 어느 특정 세대를 칭하기 보다는, 전 세대 혹은 온 세대(All Generation)의 영적 부흥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다음세대’에 대한 압박보다는 ‘전세대, 온세대’에 걸친 은혜의 부흥이 교회 안에 일어나도록 간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 2:17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녀들, 젊은이, 노인, 전 세대(All Generation)가 비젼과 소망을 품을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교회는 가정과 같다. 자녀교육이 가정의 미래가 된다.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부모가운데 자식 교육에 집중해서, 부모 자신을 돌보고, 어른 세대를 섬길 줄 모른다면, 자식의 미래는 보장할지 모르지만, 가문을 반듯하게 세우지는 못할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는 영육간에 먼저 건강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 가문을 세우는 훌륭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다음세대에 대한 부흥을 기대하고 사모한다면, 모든 세대가 영아부에서 노년부에 이르기까지, 소외됨이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부흥을 꿈꾸고 기대하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계층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교회가 예배에 은혜가 넘치고 좋아지면, 그것이 당연히 다음세대의 건강한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한 프로그램, 융합되고 통합된 그런 교육과정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회는 건강한 미래세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2.1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