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ship & Education 1 - 기준이 선명한 가르침

–종말, 익숙함, 생각과 가르침-
전남수 목사

새해가 밝았고, 새로운 소망과 비젼을 듣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유독 다음 세대가 대화의 주제가 될때에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미주 전체 한인 커뮤니티에 소개된 캘리포니아의 어느 중학교 교사의 경험담이 읽혀졌다. 본인의 학교가 속한 디스트릭에서 행한 Queer Theory 혹은 LGBTQ 권리에 대한 교육들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이다. 개인적인 판단과 경험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오픈된 내용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역겨운 생각  

 

이분이 속한 학교에서는, 학교 디스트릭의 규정상 1년에 몇 번씩 LGBTQ 단체들을 불러서 전체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시기의 아이들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남자아이들 보다 여자아이들이 더 많은데, 자기는 사실 남자인것 같다는 것과 앞으로는 자신을 <he/him/his>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이를 학교에 요청하면, 학교는 전체 이메일로 그 아이는 오늘부터 남자이니 he라고 부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이 아이는 화장실도 남자 화장실을 쓰게되는 데, 이상한 것은 그럴수록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의 인권 존중을 위해 학부모님께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한다. 집에서는 딸로 지내고, 학교에서는 남자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토로한 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하신 분이라서 원래는 상당히 오픈되어 있는 분이었다고 한다. 실제, 예술계에는 게이가 많아서 LGBTQ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졌지만, 이제는 직접 선생님으로서 그 현장의 실상을 보고서는 역겨운 생각이 들어 만 4살된 자신의 아이를 위해 서라도 탈 캘리를 계획중이라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경험담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속에서 더욱 반성경적인 행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어느 주에서는 아이가 성전환을 하고자 하는 데, 부모가 이를 반대하거나 핍박하는 경우에는 격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도 만들어간다고 한다. 이제는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엄마 뱃속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될 것 같다. 엄마 뱃속에서는 낙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고통을 겪고, 태어나서는 소돔과 고모라같은 동성애 문화에 노출되어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득한 생각이 든다. 

 

미래의 종말 현상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바이블 벨트인 이곳에도 현실화되는 것을 본다. 마켓이나 약국입구와 약사의 명함에도 뭔가 대단한 자랑거리를 말하듯이 LGBTQ Right을 선전하는 것을 본다.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종말의 현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경향들이 생활속에 파고들 때, 별로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패악한 현실을 눈앞에서 마주할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다.   

얼마 전 잘 가는 카페에서 멀쩡한 화장실 둘을 남녀공용으로 만든 것을 보고 속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남자들이야 별로 불편함이 없는데, 여자들은 훨씬 더 지저분할텐데 왜 이런 데는 한마디 항의도 없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여기 안온다.’하고 선언하고는 집 앞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멀리 떨어진 작은 커피숍을 찾았다. 

 

이상함이 익숙함으로 

 

그런데 그렇게 선언을해도, 워낙 편리한 접근성으로 말미암아 여러번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가나 하다가, 몇 번씩 자꾸 다시 가게 되니, 어느 순간 처음의 그 이상함이 익숙함이 되었고, 나중에는 예전처럼 친숙함으로 발전하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합당한 이유가 생각도 나는 것이다. 그렇지 커피집에 커피만 맛있으면 되지, 그리고 남자들은 외려 더 편해진 것 아닌가? 그런 생각들로 타협점을 찾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종말의 때에 나타날 현상들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닥칠 환란의 때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화장실 문제는 그렇게 특별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변해가더라는 것이다. 처음의 이상함이, 나중에는 익숙함이 되고, 그것이 친숙함에 이르게 되면서 나중에는 적절한 타협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마치 개구리 삶는 방식처럼, 서서히 조금씩, 죄를 죄 아닌 문화의 한 영역처럼 적당하게 해석해 버리는 일들이 나타날 예조같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도 우리 세대도 서서히 허물어 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많은 신학의 이론들이 등장할 것이며, 마침내 상식과 과학까지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약한 부분을 설명해 줄 적절한 이론을 스스로가 선택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인생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하나님앞에서 발견하지 못할 때, 허무한 행동과 의미 없는 웃음속에 인생이 허망하게 불타버릴 것이 자명하다. 

 

기준의 선명성

 

혼돈된 세상에서, 혼돈된 세상을 적당하게 설명해 줄 이상한 논리가 횡행할 이 땅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의 문제이다. 기준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세상의 죄악된 물결이 예외없이 우리 자녀들을 덮쳐 올 것이다. 그때,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살아내어야 할 다윗의 물맷돌 5개가 있어야 한다. 우주의 진공상태같은 삶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처럼 똑 바로 서서 응전과 항전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준의 문제이다. 기준을 먼저 듣고 먼저 배우지 아니하면, 자녀들의 여린 영혼에 기준도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세속의 물결이 쳐 들어올 때, 굉장히 위험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일 수 있다. 타주에 계신 어느 훌륭한 장로님의 이야기이다. 훌륭하게 공부도 잘 하는 아들이 대학을 나와서 신학교를 간다는 것이다. 4대째 예수를 믿는 가문에 주의 종이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큰 축복이 임했느냐며 자랑을 하셨다. 오늘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이 주님께 삶을 헌신하겠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말리는 신앙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훌륭한 분이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장로님이 통곡을 하시는 것이다. 아이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집에를 왔는데, 말이나 행동거지가 영 이상하더라는 것이다. 후에 들어보니, 동성애를 접하고 너무 깊이 혼돈된 상태에 빠져있더라는 것이다. 일순간 장로님 입에서, 목사님들이 뭘 가르쳤길래 평생 엄마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아이가 이렇게 될 수 있는지? 동성애를 허용한다면 신학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거친 불평을 쏟아내셨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사탄마귀의 계교가 믿음의 명문가문이라는 절대 자부심마저 깨 부숴뜨리는 것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진리가 기준이다.

 

진리가 기준이다. 진리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따져서가 아니라,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은혜와 교육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선명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애 낳기를 권장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해도 결혼과 동일한 효력을 나타내는 법을 만들려고 한다. 인생의 축복된 가정을 시작하면서 죄부터 짓고 시작하도록 하는 사단의 악한 꾀와 같은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의 영적 리더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점점 더 비워져간다. 게다가, 소명을 따라 신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을 제발 보내달라고 읍소하며 교회를 방문하고, 마치 일반 세상학교의 학생 구성원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본다. 이런 현실속에서, 앞으로 우리 자녀들은 교회 가고 싶어도 못가고, 교회를 가도 제대로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면 이보다 더한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무엇부터 해야 될 것인가?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집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가장 늦었다 싶을 때, 다시 예배와 교육을 회복하는 것에 우선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늘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세대가 긴장해서 시작하되, 진리의 밑둥치부터 잘 조성해서, 신앙의 판단기준이 되는 진리가 잘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화석을 보면, 저 딱딱한 바위에 어떻게 저렇게 깊고 선명한 짐승 발자국이 찍혔을까? 부드러운 흙일 때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우주의 진공상태와 같은 상태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처럼, 먼저 기준(Canon-잣대)을 세운 후에, 세상을 맞서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잠언 1장 7절에 말씀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 2세들이 미련한 자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도록, 성경을 기준하여 온 세대가 같이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하면서 잘 달려가기를 소망한다. 잘 안될 수 있다. 종말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맡겨버리자. 새해, 우리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 생명의 기준되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하는 일에, 그저 최선을 다하자.

davidnjeon@yahoo.com 

01.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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