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침체에는 예외가 없다. 그렇게 인정받는 신자가 영적 침체에 드는 순간 불신자보다 못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을 본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에게 특별한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간절히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그 사람이 어느 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자기가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고 돌아서듯, 교회를 욕하고 돌아서 갈 줄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예외가 없음을 본다. 처음부터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불의 종 엘리야도 죽음을 이야기하며 로뎀나무 밑에 누워 죽기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 같은 범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영적 침체의 원인이 무엇일까? 사역의 스트레스, 비교의식, 열등감, 건강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한마디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와 상황만 보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함으로, 그 문제가 한 영혼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를 회복할 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약하여 자주 잃어버린 영혼처럼 헤매게 될지라도, 다시 또다시 계속해서 꾸준히 회복의 길을 구하고 찾으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성경, 예배, 교회라고 아주 간략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세의 때를 지나가는 우리의 삶은 좀 더 단순해야 한다. 기계도 복잡하면 고치기도 사용하기도 어렵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대개 생각이 복잡하거나, 집안이 복잡하거나,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들 가운데, 그 인생도 복잡해지는 것을 많이 본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복잡하지 않다.
삶을 단순하게 가져가야 한다. 그러면, 영적인 삶의 단순함을 위해 회복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리저리 아무리 따지고 생각해 보아도, 네 가지로 규정할 법하다. 이 네 가지가 신앙과 삶을 튼실하게 하는 기초 석이 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인생인가? 영적 침체에 빠져, 마치 거미줄에 걸린 행적과 같은가? 괜찮다. 다시 한번 더 말씀, 기도, 예배, 교회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의하고 견고하게 할 때, 싸움이 없을 수는 없지만, 능히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말씀의 회복
성경은 독파 횟수에 상관없이 항상 새롭다. 보면 볼수록 새롭고 신선하게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 더불어 한 성령이 쓰신 책이기에 많은 사람이 각자의 성경을 읽어도 동일한 고백의 깨달음에 이르게 함을 본다. 신앙의 최고 가르침은 성경 그 자체를 읽고 보고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을 열심히 읽다 보면, 구절구절 자구(字句)를 일일이 따져보지 않아도 그 책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읽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틈나는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는가? 덮어놓고 믿지 말고, 성경책을 펼쳐 놓고, 잘 읽고 배우고 들으며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말씀의 회복이 일어나, 내 눈으로 말씀을 읽지만, 실제는 말씀이 나를 견인해 가야 할 것이다. 특별히 영적 침체로 인해 돌짝밭같이 뭔가를 품고 있고, 길가와 같이 딱딱해졌거나, 가시덤불처럼 마음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말씀으로 기경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듣지 못하면 말을 할 수 없다. 듣는 귀가 열리지 못하면, 입도 열리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 혹은 들음의 종교라고 칭하는 것이다. 들음에서 구원의 믿음이 시작되고,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믿음생활이 잘 듣는 데서 시작되며, 비로소 신앙의 성장과 성숙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앙의 영적회복의 시작은 말씀을 듣는 것이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말씀이 들려지는 복된 장소, 하나님의 교회,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된다.
특별히 영적침체의 때에,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팔다리를 움직여 넘어져도 교회 쪽으로 넘어져서, 주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자신을 가져다 앉혀야 한다. 거기로부터 말씀이 귀에 들려질 때, 마침내 영안이 열리고, 회복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2. 기도의 회복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고 들으며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런데 말씀만으로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잡히지 못한다. 참된 말씀을 받고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기도의 무릎을 통해, 말씀이 주신 비전이 손과 발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진다. 불같은 순종을 통해 역사가 나타나는 데, 그 힘이 기도를 통해 주어진다. 말씀의 비젼에 대한 불같은 순종은 기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삶, 기도 생활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신앙생활 하는 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신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진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기도한 것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반드시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선물로 주었을 뿐 아니라, 그 귀한 아들을 바치겠다는 기도의 서원에 복종하였을 때,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게 되었고, 후에 하나님의 전에서 자라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부모의 욕심으로 귀한 아들이라면서 자기 생각으로 붙들고 살았더라면 그런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런 분명한 순종을 가능하게 했을까? 참된 기도의 능력, 그 은혜를 맛보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은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응답하심에 대한 엄청난 약속들이 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 사람조차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크고 비밀한 일들을 드러내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 기도가 우리 영혼과 삶을 살리는 것이다.
영적침체를 경험하는 이들은 어쩌면, 영혼의 숨을 쉬지못하는 환자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호흡이 다시 열려야 한다. 가슴을 손으로 두드려 치면서도 숨을 쉬도록, 영혼의 호흡을 회복해야 한다. 호흡이 되고 나서,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호흡이 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멈춰지기 때문이다.
3. 교회의 회복
바른 신앙, 복된 신앙을 위한 한가지 길은, 어떤 상황에도 관계없이 ‘주의 교회와 예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자 곧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목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의 중요성은 많이 이해하지만, 굳이 교회를 갈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편리 주의 사상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가만히 교회마다 가지는 간증의 역사 들을 보면, 눈에 보이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를 짓고 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의 몸을 세운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피 같은 물질을 드려, 교회를 세워가던 그 마음의 뜻과 헌신들이 아름다운 간증이 되어 주의 교회를 빛나게 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가 백 삼십 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하며 성장해 온 것도, 교회 중심의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땅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님들이 처음부터 구원의 복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먼저 예배당을 세우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 예배당을 향해,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산 위에 빛난 도성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성전중심의 신앙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렵다.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70년이 채워지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했고, 바사의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에서의 귀환을 명령했다. 70년 포로에서의 회복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이었나? 단순히 몸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주의 성전을 회복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학개와 스가랴,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가 중심이 되어 돌아와서, 저들은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 속에 성전의 회복이 있듯이, 침체된 삶을 일으켜 세우려면 다시 주님의 전으로 몸을 가지고 나아와, 눈에 보이는 교회 생활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교회가 중요하다. 교회를 주님의 몸과 하나님의 집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소중하다. 성경에 크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조그마한 집에 계시겠습니까?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말한다.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인가? “내 마음과 내 눈이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눈과 마음이 있으면 전부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에 나아오는 것이 곧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 중심의 삶이 회복될 때, 영혼과 삶의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4. 예배의 회복
하나님의 교회에 모든 복이 있다. 주의 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복 내려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고, 인생의 모든 문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회복되는 역사가 있다.
인터넷 시대를 지나면서, 스스로가 작은 전자기계를 소유하고 다스리다보니(?), 말씀을 자기 선택의 기준에서 듣고 보는 신앙이 유행하고 있다. 자기가 주인처럼 되어서, 말씀과 말씀전하는 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드릴 때 드리는 자는 중요하지 않고, 받으시는 분이 중요하다. 예배를 드리는 내 시각과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와 드린다고 해도, 받는 분이 안 받으시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인의 예배였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의 인생은 형제를 죽인 최초의 살인자로서 실패한 인생으로 끝을 맺었다.
예배를 성공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회복은 예배를 통과해야 한다. 특별히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 영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의 모형이 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강가에서 수금을 걸어두고 목 놓아 울며, 그 예배하던 때를 그리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각자 알아서 자기 처소에서 2~3 사람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삶의 예배라고 하여, 예배의 형식도 없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로움, 그 자체를 예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신앙은 정한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상한 예배족들이다. 참된 회복을 위해서는 합당치 않은 일들이다.
마지막 종말 시대에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은 무엇일까? 실제적 대안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지켜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이곳에서 만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생활은 반드시 교회 생활과 예배 생활이 분명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고 찾아서 축복하여 주실 것이며, 이들이 가진 인생의 희노애락은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간과하듯 천상의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의 핵심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 인생길이 꽃길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금방 삶이 새로워지지도 않는다. 성도에게도 불신자들과 동일한 고난이 찾아온다. 질병의 문제 앞에서 예외일 수도 없다. 이를 통해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 그때 다른 정답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기도 가운데, 교회를 향하여, 예배 중심으로 나아가보라. 영혼과 삶의 회복을 통하여, 살아가는 삶의 지경까지 새로운 회복의 은혜로 채워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1.0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