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때를 지나는 우리는

-교회와 목회자, 복된 생각-
전남수 목사

복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관점이 분명해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남자가 많아도 내 남편은 한 사람이지 두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세상에 아무리 여자가 많아도 내 와이프는 한 사람이지 두 사람이 될 수가 없듯이,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교회가 세상에 이렇게 많지만 내가 섬기는 교회는 한 곳이고, 세상에 목사님들이 많지만 내게 말씀 주시는 우리 담임 목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훌륭한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복 있는 신앙생활, 축복받는 삶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 자세와 태도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이런 사상이 분명할 때, 그의 예배 태도와 자세가 달라질 것이고,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도의 마음에, 목사의 설교말씀이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마침내 그 성도의 인생이 온전히 변화될 것이다. 말씀의 능력이 그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강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렸음에도 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일까?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설교자의 한가지 의견(Just his opinion)으로 듣게 될 때, 말씀 속의 하나님의 음성은, 그저 구글님(google.com)의 메시지보다 더 신뢰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말씀은 수동적으로 받음에 비해, 구글의 정보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더 긴요하게 여길까? 말씀이 절대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면,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말씀은 들었는데, 삶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여 어떤 이들 가운데, 지금 섬기는 교회를 세상에 유일한 교회처럼 사랑하고 섬기며, 내게 말씀 주시는 그 목사님은 영의 양식을 주시는 영적아비라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성령의 은혜 아래에서 그 말씀의 엄위로운 권세 앞에 귀를 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설교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생각하며 받게 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인생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견인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말씀이 끌고 가는 복된 인생이 열려질 것이며, 마침내 참된 인생의 변화를 만족함 가운데 보게 될 것이다.

 

변화와 축복 - 교회중심

 

신앙의 결론은 변화이다. 변화가 무엇인가? 변화는 열매로 표현될 수 있다. 씨가 떨어져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이것이 변화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예수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앞에 떨어져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되어야 마땅한가? 변화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꽃이 피고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로 주님 앞에 바쳐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이러한 열매 있는 신앙의 좋은 변화는 한가지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세우신 주의 종을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롯이 듣는 것이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세상천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로, 세상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사람, 그래서 교회 생활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고장난 나침반처럼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범신론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교회중심, 목사님 중심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 말씀을 주의 종에게 일정하게 들으며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은 대부분 한결같이 풍성하고 복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았다. 삶의 간증거리가 풍성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정하게 공급받는 통로가 무너지고 없는, 그런 이들에게 말씀의 권위는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삶을 변화시킬만한 동력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다 해도, 거의 변화를 보기 어려운 일상의 종교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예전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라. 오늘날과 같이 전화기만 열면 설교가 막 튀어나오는 시대를 살기 훨씬 이전을 한번 추억해보라. 그때, 믿음 좋은 분들을 표현할 때 어떻게 말했는가? “너는 교회 가서 살아라, 너는 목사하고 결혼해라”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했다. 한마디로, “네가 예수에 미쳤구나!” 이런 광신자같은 표현 비슷한 말을 들었음을 기억한다. 때로는 예배중에 불신남편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의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섬겼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망했는가? 아니면 그렇게 열심히 믿음생활 하다가 광신자처럼 정신이상자가 되어 버리고 잘못됐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살았던 그 사람들, 죽도록 주님의 교회 위해 충성하고 자기 삶보다 늘 먼저 교회를 생각하며 살았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본다. 믿음의 명문가문을 세운 것을 본다.

게다가 믿음 좋은 분이 교회의 리더가 되어 직분까지 맡고 나면,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즉, 교회 장로가 됐다는 것, 그 말할 수 없는 책임감 때문에, 교회가 조금만 어려우면 교회로 와서 잠을 자고, 자신의 집 굴뚝에 연기가 나기전에 목사님 댁의 굴뚝에 연기가 나는가를 먼저 살피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것이다.

게다가 교회가 필요하다면, 내 생명같은 재산도 아까울 것 없이 드리면서 책임지는 삶을 살았다. 그런 경우, 당대에는 물질로 인해 힘이 들고 어려웠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자손 대대로 그 가정과 가문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날은 왜 그런 변화를 보지 못할까? 교회중심, 예배중심, 목회자 중심의 분명한 사상이 없는 이들이, 교회에서의 명예를 너무 쉽게 구하고 찾았음은 아닌지 모르겠다.

 

교회를 바라보고, 예배에 온전한 사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살고 영적으로 잘되는 데는 무조건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영적인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 주의 교회를 바라보고 예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땅의 삶이 다 지난 다음에 그 사람이 대통령을 했던지, 어느 가게에 점원을 했던 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훗날, 그가 주님 앞에 설 때는 얼마나 주를 위해 살았는가? 얼마나 온전한 예배자로서 교회를 섬겼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노벨상을 받은 것도 상관없다. 오직 한가지, 우리들의 삶에 분명한 것은 어찌 하던 주안에서 영적으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며, 영적으로 강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교회에 벽돌 한장이라도 얹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땅에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의 사자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우며, 교회와 목사님에게서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보다 큰 행복과 기쁨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일평생 주의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주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한 복은 없을 것이다.

 

한결같은 예배자리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교회 40주년을 기념해서 최고의 공로상을 줄 분을 찾았는데, 누가 뽑혔느냐? 개척때 부터 지금까지 3대가 교회에 충성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분들이라고 한다. 왜 그러셨냐고 여쭈어보니, 딱 한마디를 하셨다. “목사의 마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주님앞에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분, 그런 분들이 귀한 분들이다. 그분의 소감은 무엇인가? 그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따라 오며 그 말씀을 들었더니, 자신의 평생에 복이 임했고, 그 은혜와 복으로 인해 더욱 교회와 주의 종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신앙생활하는 교회가 평생 다닐 교회로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몇대를 거쳐, 교회를 지키기 위해 좋은 직장도 내려놓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주의 종을 영적 아비로 생각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런 사상을 말하면 엉뚱한 답이 돌아온다. “목사님, 내가 왜 저사람들의 아비입니까? 각자 하나님앞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지요. 목사는 목사고, 성도는 성도이지요”

결국, 그런 이해들로 인해 누가 손해를 보는가? 목사나 성도나 모두가 손해가 된다. 성도는 자신들을 위해 목숨바쳐 목양해줄 목자를 만날 수 없고, 목자는 남남처럼 서먹한 관계로 목회생활을 연명한다. 게다가 어떤 젊은 목회자는, 목자는 유일하신 예수님 뿐이고, 모든 목사는 양몰이 개와 같다고 한다.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의 내적자세일 뿐, 양같은 성도를 목양하라고 목자로 자신을 세우셨다는 거룩한 소명감에 금이 가서는 곤란한 것이다.

연세가 들면, 노인 아파트를 찾아 정든 교회를 떠나가는 이들이 있다. 아주 낙심이 된다. 평생 예수 믿고 예배드렸던 그 교회는 무슨 의미일까? 평생, 마지막 손발을 움직이고, 지팡이를 짚을 힘만 있어도, 교회근처에 쪽방이면 어떤가? 예배드리러 가기에 적절한 처소가 있다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말씀 듣고 예배드릴 그런 곳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않고, 참된 노년의 멋진 삶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늘 강조한다. 연세가 드실수록, 내 장례위원장 목사님이 누굴까가 분명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민교회를 보면 장례식할 때 너무 다양하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장례예배 순서를 정하기도 쉽지 않다. 세월이 갈수록 마지막이 점점 좋아지는 Finish Well 할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무엇보다 내가 섬기는 교회, 내게 말씀 주시는 목사님이 분명해야 한다. 이땅위의 모든 회복, 행복, 축복의 시작점이다.

davidnjeon@yahoo.com 

1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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