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랑, 참된 예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몸을 드려 예배하기에 힘쓰는 구별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 통상 구원론의 관점에서 에클레시아(Ekklesia), 'ek(밖으로)'와 'caleo(부르다)'합성어로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교회가 되고 장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다면, 술집이나 식당에서도 가능할까? 아마 그곳에서 크게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면, 주님이 찾아오시는 게 아니라, 웨이터가 달려올 것입니다. “손님,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모형이다. 마음과 생각이 아무리 배 안에 있어도, 방주의 문이 닫히면 배 밖의 사람은 죽게 될 따름이다. 가정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장소에서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지, 가족이 만나지 못하고 늘 흩어져 산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노숙자가 되거나 나중에는 가정도 해체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는 그 사랑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사랑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 사랑, 예배사랑은, 곧 그가 섬기는 교회를 사랑할 것이다. 흔히, 하나님과 예배를 사랑하지만, 눈에 보이는 교회는 그저 건축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며, 교회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이들을 많다. 교회를 사랑하자고 하면, 자신들이 교회이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자는 사람을 오히려 ‘건물지상주의자’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나 실제의 삶에서, 내 교회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 흔히 가나안 성도로 표현되는 일정한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온전한 신앙생활이 잘 되지 못함을 보게 된다. 일례로, 저들이 먹는 음식은 동냥젖과 같은 것이다. 가끔은 외식이 맛있기도 하겠지만, 그것만 고집해서는 한가지 분명한 것, 결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에클레시아가 구원론의 관점에서 중요하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몸을 드려 예배하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물질계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온전한 삶을 위해 몸의 건강이 중요하듯이, 참된 신앙은 예배 생활뿐 아니라,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특히 눈에 보이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미주의 어느 지역에 갈등으로 나눠진 교회가 첫 주일 예배를 파빌리온에서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첫 주에는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었는 데, 둘째 주에는 모두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어린양처럼 근심이 얼굴에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셋째 주에는 그중의 절반이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다. 사상을 논하기 전에, 성경 자체의 증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 중요하다면, 수천 명이 모이는 곳은 얼마나 더 소중하겠는가?
무교회주의 운동과 성경
일본은 무교회주의 운동이 강했다. 우찌무라 간조 등의 영향이 크다. 그 결과 지금 선교사님들은 10년을 선교해도 10명의 세례자를 얻기가 어려운 곳이 되었다고 한다. 결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10년에 열 명의 세례 자를 얻은 그 선교사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한국의 김교신, 함석헌 같은 이들이 무교회주의 운동을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런 신학 사상 보다 성경 자체를 관심을 두었고, 마침내 무교회주의의 달콤한 의식있어 보이는 생각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경위에 교회와 신앙의 사상을 두는 큰 복을 누리게 되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사경회를 하면서까지 성경을 사랑한 저들의 삶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복을 내려 주셨다.
성경을 보니, 무교회주의는 아니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을 읽으며 다윗의 신앙과 삶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을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으로 전환한다. 다윗이 비록 텐트에 법궤를 두었지만, 얼마나 주의 전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저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불같은 마음을 허락하셔서 성전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마침내 교회의 장로만 되어도, 주의 전을 건축하는 사명 앞에 기꺼이 헌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찔한 시간이었다. 그때 이들의 사상에 동조해서 ‘어디서나 예배드리자?’ 하는 운동이 유행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는 것일 듯하다.
거룩한 구별된 장소, 교회
나는 건물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교회 건물을 얼마든지 부수고 허물고 더 좋게 짓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이곳은 거룩한 구별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웃시야 왕이 죽고 절망에 있던 이사야가 주의 성전에서 본 환상이 무엇인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흘러 내렸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장소로서도 어떤 곳인가? 함부로 경거망동하거나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다. 강단을 지성소처럼 취급하라는 말이 아니다. 구별된 장소로서의 교회관이 온전한 예배를 드림에 마땅하다는 것이다.
몸이 교회 오는 것이 예배이다. 몸이 교회 오는 것이 진짜 예배, 참 예배이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손과 발을 움직여 몸을 움직여 교회로 나아오셔야 한다. 예전에 믿음 좋으신 분들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버선을 두 개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예배를 드리고서는, 그 버선을 갈아 신고 집으로 오셨다. 그런 분들이 신앙생활 할 때는 교회나 가정 가문에 복이 넘쳤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왜 그런 간증들이 없는 것일까? 시대의 악함도 문제겠지만, 몸을 가지고 교회로 오지 않으니, 그렇게 되었으리라 본다.
시시한 장소 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으로 예배한다고 말한다. 꼭 몸이 갈 필요가 있느냐? 마음과 정성으로 드리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몸 없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영으로 예배할지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이 몸을 움직여야만 하고, 그때 비로소 진짜 영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예배중에 옆에 빈자리가 보이는데, 그 옆에 오늘 안 보이는 김 집사님이 몸은 집에 있는 데,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자신의 영혼을 교회로 보내어 와있다고 한다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몸과 영의 분리는 죽음인데, 몸은 집에 있는 데 영혼만 돌아다닐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육신이 보이지 않고, 영만 와 있으면, 그것은 귀신이 와 있다는 것일 텐데. 결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과 육이 분리되고 끝이 나는 것이다. 귀신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겠는가? 영혼이 어떻게 영으로만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내 몸을 움직여서> 몸으로 주님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참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영상예배의 예는 앞선 호에서 충분히 소개했기에 생략했다.
교회사랑, 예배사랑, 하나님 사랑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할 때,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주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를 해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단지 교회를 핍박했을 따름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를 사랑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해치고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해치고 핍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 예배를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의 좋은 표준이 된다.
더 나아가 예배의 실패는 모든 것의 실패임을 성경은 말한다. 구약에서 왕들의 역사를 보라. 흥망성쇠의 기준이 예배이다. 다윗왕과 사울 왕을 비교하면, 죄의 강도가 비교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은 살리시고, 사울을 버리셨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데, 왕이 나올 수 없는 약한 지파인데, 왕이 되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알 때에는, 더욱 은혜가 충만하여 성령 충만하여 방언도 했었다. 그러나 은혜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왕관을 지키고자 했다.
교만이 하나님 앞에 멸망의 지름길이 된다. 교만이 무엇인가? 교만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위치를 벗어나는 것과 예배를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예배를 드렸다. 그의 교만이 그를 죄 가운데 방임하게 만든 것이다. 후에 사무엘이 찾아와 말을 해도 회개하지 않는다. 예배에 실패하면, 성령이 가로막혀, 회개할 줄을 모르고 핑계하는 인생으로 전락하게 됨을 보여준다. 당연히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할 사람이, 외려 사무엘이 늦게 온 것이나 전쟁의 형편을 핑계한다.
결국,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 그리고 마침내, 길보아 산에서 목이 잘려 벳산 성벽에 걸리는 데, 그날 동시에 세 아들마저 적의 손에 죽었다. 하나님이 한번 버리시면, 너무 비참해지는 것을 본다. 이에 비해 다윗은 더 큰 죄를 범했다. 살인교사, 간음죄 등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 더 나아가 그의 자손들이 잘못해도 늘 ‘다윗으로 인하여, 다윗 때문에’라고 하시면서 저들을 살려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은 예배의 사람, 성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회개에 인색하지 말라
그래서 늘 우리는 자신의 예배 생활과 교회 생활을 점검해야 한다. 회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 성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마다, 가장 먼저 회개함으로 마음을 축축하게 하면서, 옥토 밭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며 예배해야 한다. 인생은 실수한다. 의인도 7번이나 넘어질 수 있다고 했다. 넘어짐의 명수인 인생이 회복할 기회는 오직 한가지 ‘회개 기능’이 잘 작동해야 한다. 회개는 허물 많은 인생이 사는 길이 된다. 더불어 내가 살고, 나와 함께하는 가정 가문, 자손들이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9.0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