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변화
티벳에 있는 어느 선교사가 전해준 이야기이다. 물이 귀한 곳이어서 잘 씻지를 않아서, 지역의 주민들이 교회로 왔다 가고나면 오래동안 그 냄새가 아주 지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냄새가 나지 않기를 시작했는데, 이유인즉 저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절로 교회 오는 모습이 바뀌어 지더라는 것이다. 말하는 것도 바뀌고, 걸음걸이도 바뀌고, 옷 입는 것도 바뀌고 새로워 지더라는 것이다. 안팎으로 바뀌어지는 것, 이것을 “은혜받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받은 사람을, “사람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말씀과 성령,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새롭게 되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시기를 지나면서 예배가 많이 상실되었다. 여전히 예배의 회복이 어려운 시점이다. 그런 현상의 중심에는 가장 우선적으로 홀로족으로 표현되는 개인주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신앙은 함께 나누고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개인주의
하와가 혼자 있을 때에 범죄의 타겟이 되었다.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좋은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자 몸살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좋은 예수님,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님을 믿고서도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혼자만의 신앙을 고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의 필연적인 영향력과 전염성을 말한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을 때에, 반드시 그 자신과 그 가정과 가문의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임을 말하지 않는가? 그 좋은 예수를 남편에게, 자식에게, 이웃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뎌 낼 수 없게 되는데, 이 예수를 전하다 보면 절로 그 사람 자신과 그 주변을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가문이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었다고 할 때, 가만히 따져 올라가 보면, 반드시 미치도록 지독하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던 한 사람이 있음을 보지 않는가? 영적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사라같은 할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개인주의에 매몰이 되어서는 결코 온전한 변화의 역사를 간증하는 인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편리주의와 악한 게으름
신앙의 개인주의와 더불어 힘을 쓰는 것이 편리주의이다. 굳이 내가 교회 가지 않아도, 코로나 시기에 영상예배를 드렸음을 생각하면서, 예배하는 주일이 되어도 침대에 누워 전화기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주일날 교회로 나아오라고 하면, 코로나 때 드린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었나? 그렇게 반문한다. 예배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제한적이고 한계의 전제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신앙의 핍박이 찾아왔을 때, 저들은 핍박을 통하여 카타콤이라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다. 해골 바가지(?)를 옆에 쌓아 두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를 포기한 채 예배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맞닿은 곳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 가운데는 제주도 극동 방속국에서 쏘아 올리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듣고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예배드린다고 한다. 게다가 라디오 방송만 듣고도 어려운 노동의 현실가운데서도 예수를 영접하고는, 십일조를 해야 하는 줄 알고, 그것을 천조각을 꿰멘 누비 이불속에 집어넣어 방송국에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주도 애월읍에 있는 극동방송극 지하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지금도 북한에 예수 믿는 이들 가운데는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 땅을 파고 숨겨둔 선대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내어 둘러앉아 소리죽이며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카타콤, 블라디보스톡, 북한의 지하교회 등은 교회라는 장소도, 예배의 형식도 없다. 그러나 그 어느 화려한 예배당의 예배보다 더욱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일 것이다. 신령과 진정이 온몸으로 드려지는 참 예배이다. 그러나 이 예배는 제한적인 조건하에서 드려지는 한계가 있는 예배이며, 언젠가는 밝은 광명의 세상에서 마음껏 주의 전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친교할 그 날의 예배를 바라보며 드리는 예배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광명한 세계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골방예배를 주장한다면, 이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영상예배의 한계
영상예배가 제한적인 조건에서 예배를 드릴 상황에서는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얼마든지 주의 전에 나아와 새벽을 깨우고 예배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양의 영광을 올려드리고,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성도의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골방의 기도라는 근거없는 브릿지를 가지고서 주의 전에 나아와 성전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게으른 것이며, 성경에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신앙생활의 연장이라는 책망을 받지 않겠는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장애하는 편리주의의 한 방편임을 알게 된다.
쉽게 말한다. 마음과 정성만 있으면 되지, 굳이 몸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핑계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신앙생할의 기준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내 몸을 가지고 가서 예배드린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전의 신앙좋으신 분들은, 늘 교회 생활이 분명한 분들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의 전을 향해 나아와서 예배드렸다. 이것이 복있는 성도의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
사람들은 마음이 중요하지 몸이 중요한가?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이 땅에 몸을 두고 사는 동안에는 몸과 마음은 함께 가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교회의 모형이다. 노아 할아버지가 방주안으로 오라고 말씀할 때, 마음을 방주 안에 두고, 몸은 방주 밖에 둔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살지를 못했다. 교회를 떠나 멀리 이사하는 성도가 찾아와 “마음을 이곳에 두고 간다.”고 말한다.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 나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집사님, 마음은 필요없고 몸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결국 몸이 멀리 타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도 나도 잊어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땅이라는 물질계를 살아가는 동안, 영혼이 혼자 움직일 수는 없다. 몸이 가야, 영혼도 정신도 가는 것이고, 마침내 ‘사람’이 사는 것이다. 오늘날 지나친 편리주의에 근거한 삶의 형태가 많아졌다. 자기가 좋으면 다 좋고, 자신이 싫으면 모든 것이 싫다는 것이다. 그 좋고 싫음의 기준도 어느 적절한 정언명법의 일부라도 되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못하다. 이유를 물어보면, 아주 절대적으로 명쾌하다. ‘무조건 싫다.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절대적인 우문이 어디 있단말인가?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 형태가 이렇게 많이 흘러간다. 대책없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물질주의와 타락
개인주와 편리주의와 함께 물질주의에 대한 것이 교회와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교회의 헌금생활에 대한 약화와 이를 합리화하는 차원의 새로운 관점의 등장이다. 결국 신앙의 타락과 혼돈이 가져온 내용에 다름이 아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의 삶, 편리주의에 입각한 신앙행태,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질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분명히 어리석은 판단의 연장으로 이어진다. 교회의 헌금을 피같은 돈을 바친다고 표현한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헌금의 거룩한 의무에서 자유를 원하는 것인데, 실제는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져 버리는 통로를 열어가는 일이 된다.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될 때, 시험든 성도가 외치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특별히, 돈의 문제를 외친다. 은혜가 떨어진 교회에서 생긴 일인데,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을 소개해 본다. ‘내가 피땀 흘려 벌은 걸 가지고 교회 갖다 줬더니, 목사가 혼자 톡 털어 넣어서 자기 입에다 다 집어넣었다.’ 교회와 인생의 연약함을 전제하지만, 물질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한 신앙생활의 전형이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가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될 때, 영육간에 가난한 신앙의 행태가 성도들의 삶도 그렇게 인도하게되어 교회의 부흥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마침내, 당연히 행해야 될 십일조의 의무조차 율법주의로 몰아가면서, 그저 목사가 성경해석을 청중의 입장에서 하지 못한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몰아가서 하나님이 복주시고 세우신 질서들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마침내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들을 파괴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은혜이고, 하기 싫은 모든 것은 모두가 율법이라는 폄훼를 하면서 땅에서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
물질을 넘어서는 영적파워
평균적인 신앙은 좋은데, 물질의 문제에 항상 넘어지는 성도가 있다. 결국은 물질의 문제도 신앙의 문제의 연장이기에, 그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점검되어지고 새롭게 되어져야 한다.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하는 데 까지 이르지를 못한 이유이다. 목회자들이 사례가 부족함에도 은혜 가운데 일들을 도모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짐은 왜일까? 그들이 가지는 영적인 지평 안에서 땅의 문제를 보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좋은 신앙으로, 물질 문제 그 자체를 두고서 하나님과 함께 얍복강 씨름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물질의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신을 드려보아야 한다. 그때 물질 부분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회복이 되어지며 더 놀랍게 쓰임받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질서의 회복이며, 더 나아가 영적인 질서가 회복되면, 물질 문제의 악순환도 회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끊고 맺어야 한다.
예배의 회복과 성공
교회의 회복과 삶의 회복을 위한 최고의 통로는 모든 신자 개인의 예배의 회복에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교회와 예배의 회복을 방해하는 악한 영의 궤계중에는, ‘개인주의, 편리주의, 물질주의’ 사상이 있다. 이 장벽은 더욱 견고하여져서, 주님의 말세지말의 증상들을 확연히 앞당기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를 쳐서 이길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주님께서 답을 주고 계신다. 깨어 경성하는 것이다. 홍수날 노아의 방주에 해당되는 주님의 교회로 몸을 피하는 것이다. 주의 전에서 예배에 승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편에 서술토록 하겠다.
davidnjeon@yahoo.com
08.1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