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준, 가르침과 배움

-은혜, 본문, 영권, 경외함-
전남수 목사

신앙의 기준과 기초

 

한국교회나 서구교회들이 오랜 신앙의 전통가운데, 결코 변질될 수 없는 신앙생활의 성경적 근거로 드는 것들이 있다. 기도와 말씀, 전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신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목회현장에서 복된 개혁 신학의 전통위에 맺은 귀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마다 수많은 성장 프로그램과 교육방법을 진행하고 있지만, 실제 참된 영적 회복의 현장들에는 앞서 언급한 기준들이 불변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과연, 기도와 말씀에 열정 없는 교회, 전도에 아무런 사명감이 없는 교회, 주일성수를 해치거나 십일조 신앙관을 분명히 가르치지 못하는 교회, 그런 교회들에게서 참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의 기본 전제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저들의 주장 가운데 한 가지는 지나치게 율법주의처럼 강조한다는 것이다. 나름의 근거를 들어서 말하기도 한다. 참 좋은 신앙의 전통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안에서 너무나 형식적인 모습으로 많이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은혜받으면 될 일을, 굳이 강조하고 강조해서 형식화를 시키다보니, 외려 부작용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이 다양성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 주일성수나 십일조, 예배를 강조해서 과연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성장할 것인가? 답답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달콤 살콤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고, 그 감동이 은혜가 되어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동의할 수 없다. ‘본질과 기본’의 문제는 열매의 문제, 사람의 문제, 세상돌아가는 모습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하는 데, 청하고자 하는 목회자가 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등을 너무 강조하기에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모범적으로 이를 실천하고 행하기에는 그만큼 형편들이 따라주지를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때 한분의 장로님이 선지자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적어도 목회자라면 그렇게 이야기 하고 강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형편을 따라 지키고 못지키고는 우리 성도들의 결단의 몫이고, 목사님은 기준과 본질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정말 시대를 거슬러가는 선지자같은 말씀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기준과 기초를 말하기에,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현실은 너무 성경에서부터 멀리 와 있음을 보게 된다. 

 

은혜, 나태와 게으름 

신앙생활의 은혜를 강조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은혜가 주는 평안이 아니라, 편리하고 편안한 신앙생활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온전한 화평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 질서는 기초와 뼈대의 구조가 잘 갖춰진 상태를 말한다. 기초가 부실해서 곧 무너져가는 건물 안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하모니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해도, 결코 행복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은혜가 넘쳤던 신약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화평가운데 든든히 서 있다’(행9:31)는 표현을 기억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처럼,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저들이 이루어 가는 공동체가 가장먼저 은혜받은 화평함이 가득했었다. 조금도 평화를 맛볼 수 없던 척박한 현실가운데서, 교회가 가지는 그 놀라운 평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곧 교회로 교회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분쟁과 소란스러울 때, 이것이 좋아서 모여드는 경우는 없다. 모여도 얼마가지 않아 깨뜨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원하는 분열의 모습을 저항하는 화평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러나 화평과 화목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마땅히 배우고 가르쳐야 될 신앙생활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지 못하면, 그 화평은 쉬 언젠가 허망하게 무너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로운 공동체는, 모두가 ‘좋다 좋다, 은혜로 합시다.’라고 하는 분위기속에서도 한결같은 신앙의 분명한 가르침과 배움을 가져야 한다. 실제 초대교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보면, 함께 모여 떡을 떼는 복된 모습과 더불어 항상 가르침과 배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된 은혜의 기초에는 온전한 배움과 가르침이 있음은 참 불편해 보이는 진실이지만, 믿음으로 듣는 이들에게는 축복이 될 것이다.

 

단단한 음식, 장성함

 

가르침과 배움은 교회를 세워가는 성숙한 신앙의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르침과 배움을 등한시하는 현상의 중심에는,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는, 일명 ‘은혜중심’의 달콤 살콤한 목회적 적용이 한 몫을 감당했다고 본다. 성도들로 하여금 뿌리 깊은 신앙과 삶의 축복을 간과하는 이유가 되었다. 과실수를 키우다 보면 깨닫는 진리가 있다. 여름가물에 너무 많은 물을 주지 말라는 원리이다. 늘 물이 좋으면 과실수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무는 여름가뭄에 스스로 물을 찾아 땅속깊이 뿌리를 내리는 데, 그때가 메마를 때라는 것이다. 

인생이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단맛이 아닌 쓴맛이어도 그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고, 성장과 성숙을 가져오며, 마땅히 그리스도께로 자라갈 양분을 얻는 것이라면, 힘써 결단해야 한다. 그런데 항상 편리와 편안을 은혜라는 이름으로 찾으며, 훈련의 뒷자리에만 머물게 될 때, 외려 스스로 은혜를 벗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의 어느 유명한 목회자가 언필칭 ‘우리가 인생의 어떤 선택지를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고 나아가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함으로 모든 것에 승리가 주어진다.’는 말을 해서 많은 이들의 절대 공감을 얻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굉장히 오역할 수 있는 무책임한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고백적 예정론과 같이 삶의 여정을 다 지나간 후에,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언설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살아보지도 않고, 살아갈 날들이 창창한 이들에게 너의 선택의 자유의지가 은혜와 결합할 때, 네 삶은 축복이 될 것이다. 얼마나 희망을 주는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희망은 하나님 안에서의 결단과 순중, 말씀에 대한 철저한 자기항복에 게으르게 만들 뿐 아니라, 인생의 죄악에 대한 간과를 가져와서 참되고 진실한 정금같은 신앙으로 성장과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복된 기회를 잃게 될 또 다른 좋지 않은 기회를 주지는 않을는지 염려가 된다.

 

배움과 가르침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열매의 결실을 보지 못하는 잠시 잠간의 감정적 터치에 불과하다면, 결국은 허망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신앙의 감정이 필요하지만 감성주의가 곧 영적인 것인 양 눈물을 흘리고 느끼며 감정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보다는 감정과 감성 혹은 감각적인 신앙생활이 되어 버리면, 그 열매가 빈 껍질처럼 되고 말 것이다, 

어찌 보면 Caring Pastoral 보다 더 못한 감정에 호소하는 연약한 믿음으로 흘러가 버린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대단히 단단(hard)하고 고루한(boring)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fact)이며 진리(truth)이므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증거 하신다. 다양한 은혜의 프로그램의 개발이 교회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본질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본문중심의 성경에서 시작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나도 싫어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 자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은혜가 임하면 자연스레 알고 깨달을 날이 있겠지만, 그러한 과정도 실제는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홀로 독야청청하는 사람이 절로 하나님을 알고 깨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자체를 알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에 이를 수가 있을까? 성경자체를 많이 읽고, 보고, 듣고, 순종의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성도들 중에 미국에 이민을 와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에게 가르침을 통해 은혜를 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 원리는 단순하다. 쉽지 않지만, 딱딱해 보이는 성경자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성경 본문을 본문으로 공부하며 변증하는 방법을 적용하는 일이었다. 딱딱하지만 구체적으로 본문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자체를 함께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큰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교회마다 가르침과 배움을 말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응용하지만, 실제 은혜의 원액은 성경 그 자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성경자체를 배우고 들음

 

말씀자체가 주는 힘은 실로 엄청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고 또한 양날을 가진 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 칼로 골수를 쪼개기까지 한다 하였으니 에스겔이 말씀만 읽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가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고, 예수님도 금식 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친히 신명기의 말씀을 전하시므로,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아모스서에서 사람이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하여 굶주리고 기갈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 보면 “성경 말씀은 영혼의 양식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육신이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처럼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영혼 역시 죽은 것이므로 하나님께 산제물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화적 설교보다는 본문 중심의 설교와 공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로 본문 중심의 성경공부를 변증하며 정리한다면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어 목회적으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본문자체를 정리하는 성경공부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애독할 수밖에 없고 성경애독과 더불어 이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찾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은, 성경공부나 설교가 이렇게 진행됨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성경말씀중심,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목회자 자신에게는 영권이, 이를 순종하며 따라오는 성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비로운 경외감’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즉, 말씀의 권위에 대한 행복한 굴복이 상호간에 충만해 지더라는 것이다.  

 

영권과 주를 경외함

 

오늘날 다시 기초와 기준을 세워야 한다. 새롭게 세움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옛날로 무조건 돌아가는 회귀(回歸)가 아니라, 회복(回復)을 필요로 한다. 기준을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약이 된다면 부담스러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단단한 음식의 양약을 먹는 과정이된다. 건강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 자체를 배워야 한다. 그 방법은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자체를 배우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고백서 마저도 성경의 자증하는 은혜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을 본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배우고 들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연역적 방법을 제안한다.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 자체를 성경에서 배우고 들을 때, 주의 종들에게는 영권이 주어지며, 이를 듣는 주의 권속들에게 주를 경외함의 엄청난 영광의 기쁨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주의 종들과 교회와 말씀이 너무 하나님 자체에서 너무 멀리 와 있음을 본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즐거운 회복의 일들이 불일 듯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davidnjeon@yahoo.com 

 

07.2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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