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중심, 신앙과 삶

-교회, 영성, 회복과 축복-
전남수 목사

교회관(觀)

 

교회를 생각하는 관점이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의 내용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 교회가 평생 내가 섬길 교회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도 이 사람과 내가 살수도 있고 언제라도 헤어질 수도 있는 관계, 깊이 사랑하지 않고도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는 관계, 그런 관계들은 서로의 인생에 불행하다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항상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좋을 수는 없겠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이 사람은 내 운명이다, 평생 생명 바쳐 사랑할 사람이다.’ 그런 마음과 생각으로 약속을 지켜가는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된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내 교회는 바로 이 교회다.’라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섬기고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은혜와 복과 열매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작은 허물과 연약함에 결코 교회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교회에 대한 관점은 그의 신앙생활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끼리는 뭔가 모르게 신앙의 좋은 냄새가 있음을 본다. 그래서 교회 가서 기도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분들을 만나면 은혜가 된다. 혼자 성경 읽는 것 보다, 교회 가서 말씀 듣는 것이 더 마음에 힘이 된다는 분들을 보면 절로 기대와 소망이 넘쳐나는 것을 느낀다. 

 

교회는 참된 영적구현

 

성도들은 신앙생활 가운데 신령한 것, 영적이라는 것을 추구하고 또 많이 간증한다. 이 땅의 일이 아닌 조금은 다른 차원의 세상 이야기로 들려진다. 그럴 때 마다 영적유익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삶 속에서 영적이라는 것은 그 신앙이 현실계와 물질계속에 구현될 때 의미가 있어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영적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는 반드시 육신의 삶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땅 어디에서 그런 신앙의 영적구현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삶의 다양한 터전을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이 땅 물질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처치, AI 목사들을 유행처럼 말하는 시대에는 의도적 선명성을 더욱 강조하면서까지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와 더불어 눈에 보이는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한 관점은 이 시대만의 독특한 생각이 아니다. 땅위의 지상교회의 역사들을 살펴보면, 그 내용 줄기들 마디 마디에 간증의 역사와 증거들이 차고 넘치는 것을 본다. 모든 교회들마다, 그 교회가 참되고 바르게 세워지는 과정들에는 반드시 몸을 드려 교회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성도들의 간증의 역사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함을 본다.

 

교회는 회복과 축복의 소망

 

어떤 장로님의 간증이다. 이민 생활의 갈등 때문에 아내 되시는 분이 가출을 했다고 한다. 남편 되는 분은 모든 사업과 일들을 다 제쳐놓고, 원통함과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내를 찾기 위해 온 미주의 도시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중부의 어느 도시를 찾아갔는데, 주일이 되어 예배처소를 찾다가 초막같이 허름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그를 기다리시던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 분노와 원통함, 억울함과 복수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마음을 다 내려놓을 만한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예배시간에 아내를 찾으려고 들고 온 돈과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교회앞에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허름했던 교회는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새롭게 교회를 짓고 완공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본인이 그 교회의 장로가 되어 한번 더 교회를 건축완공까지 했다고 한다. 끝이 좋은 인생, 시시한 복수극으로 끝날 인생이 주님안에서, 교회안에서 은혜를 맛보고 누리게 된 것이다.

삶의 원통함과 분노와 상처들도 눈에 보이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찾아 나아오고, 그곳에서 참 예배를 드리게 될 때, 마음의 모든 어두운 장막들은 물러가고 마침내 회복과 축복의 역사가 나타남을 본다. 주의 전에서 예배할 때, 회복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터치가 있다. 마음의 어둠이 물러갈만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심으로, 주님의 은혜와 은총이 가득하게 채워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회복이며, 축복이다. 

회복을 원하는가? 주의 몸된 교회에, 정한 시간 정한 장소로 몸을 움직여 나아와야 한다. 주님의 교회로 나아오지 않고는,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의 복을 누릴 수가 없다.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 발걸음하며,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주의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주의 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된 회복과 축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회복은 교회에서 예배부터

 

예전, 한국 교회에는 이러한 간증들이 무수히 많았다. 서울 여의도에 순복음 교회가 지어지기 전, 그 시작은 서대문의 천막교회였다. 그 천막에서 하루 여섯 번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성도들 대부분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사업에 실패한 실업자들이었는데, 그들을 향해 외치는 조용기 목사도 역시나 폐병 환자였다. 폐병으로 인해 설교 중에 피를 토하면서 ‘되지도 않은 그런 일 다 내려놓고 예배부터 드리라’고 피를 토하듯이 소리쳤다고 한다. 실제, 병으로 인해 피를 쏟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설교말씀에 사람들이 무리와 같이 몰려들었는데, 대부분이 삶에서 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없는 중에도 은혜받아 헌금하며, 마치 성막을 건축하려고 예물을 드릴 때에 모세가 백성들을 향해 그만 가져오라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자원하여 드리면서 기적의 역사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뭐가 남아서 드렸겠는가? 남아서, 남으니까 드린 것이 아니라 과부의 두렙돈처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전부를 드린 것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적 같은 은혜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들 천막교회 나아왔던 이들이, 믿음으로 영적인 힘을 내고, 하나님앞에 그렇게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의 지혜를 얻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믿음의 기업가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들이 순복음 실업인회를 만들어 목사님의 목회와 선교사역을 뒷받침하며,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를 이루게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들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은금 패물을 가지고 왔지만,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해서 넉넉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지나칠 정도로 자원하여 드렸을 때, 저들의 중심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베푸셨다. 비록 가진 것이 없는 광야의 길이었지만, 저들의 모든 행로를 친히 책임져 주신 것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여기시고, 친히 인간이 만든 그 천막 속에 거하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성막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므로, 열방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가장 복을 누리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를 사랑, 교회앞에 헌신

 

이런 역사는 어느 특정한 민족과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강남의 어느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짓기 위해 성회를 하는데, 은혜를 받고 기도의 손을 모으는데 손에 반지가 잡히더라는 것이다. 그때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들고 온 것 뭐 하러 다시 들고 가나?’ 그래서 그 음성에 순종해서 풀어서 주님께 내어 드렸다고 한다. 또 집에 금수저 은수저가 있는데, ‘그냥두면 녹 쓰는데 교회 기둥하나 세우지?’ 그런 음성도 들리더라는 것이다. 금수저 은수저가 녹슬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워낙 은혜가 넘치다 보니, 땅에 쌓아둔 재물에는 좀과 동록이 해한다는 말을 성령께서 붙들게 하심으로 그런 결단도 생기게 된 것이다.

어느 교회가 건축 문제를 두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도 중에 교회 근처에 땅을 가진 믿음 좋은 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자꾸만 차들이 땅에 들어와서 지나 밟고 가길래 화가 조금 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화가 오를 때, 주의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자네 땅을 차가 자꾸 밟고 지나가는데, 거기 교회 지으면 못 밟을텐데.’ 그런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그 음성에 순종해서 주님 앞에 헌신한 그 흔적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고는 마침내 은혜의 대를 이어가며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큰 방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믿음과 헌신

 

오늘날, 가급적 교회를 간소화시키고, 주일 성수의 탈 자유화를 통해서까지도 교회를 선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배와 신앙의 삶을 Non-Stop Service처럼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치우도록 선전한다. 이러한 초특급 서비스 시대에 교회건축과 관련된 위의 간증들을 말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 하물며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대부분 ‘시대를 못 읽는 꼴통(?)목사’의 생각으로 치부할 것 같다. 

적당히 교회와 목사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한마디를 하면 꽤 괜찮은 교회와 목사로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 시대에 무슨 교회 짓는 이야기를 하느냐?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자신의 일보다는 교회를 더 우선하며 사랑했던 그런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지금 이 세대가 이만큼 자라왔고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잊으면 배은망덕한 것 아니겠는가? 목회라는 것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최종결정권자는 주님이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함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못났다 하여도, 그 부모없이 세상이 생명의 빛을 볼 수도 없었고, 스스로 기저귀 갈아가며 자라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녀는 복이 있다. 교회가 아무리 부족해도, 그 가운데서 신앙의 기초를 배웠기에 지금 옳고 그름에 대해 목소리도 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모습이 초라하고 연약해도 믿음의 선배들의 그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기에, 마음껏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오늘날 언제 어디서나 손쉬운 정보습득 능력으로 신앙의 지식은 많아졌지만, 손과 발을 움직여 순종하지는 못하는 가분수 신앙들이 많아졌다. 세련된 것을 찾고 구하지만, 그럴수록 신앙은 세속적이며 천박해짐을 기억해야한다. 

 

교회중심의 영성회복

 

기독교 신앙의 영성은 교회와 예배의 온전함에서 시작되며 깊어지고 넓어지고 끝이 난다. 눈에 보이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가운데, 온전한 회복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난다. 예배 가운데 들려지는 주의 음성에 손과 발과 온 몸을 드려 헌신하며 순복할 때, 하나님의 귀한 역사는 불타오르듯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다. 교회는 그만큼 소중한 곳이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두손들어 축복하여 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1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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