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세상, 불변하시는 하나님

-충성, 믿음, 기도, 한결같음-
전남수 목사

충성과 믿음, 영광과 기쁨

 

잘 되는 사람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음을 본다. 절로 그렇게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삶과 일, 사명에 대한 '충성됨'이 드러난다. 충성됨이라는 게 무엇인가? 충성은 “한결같음”이다. 기분에 따라 반짝 열심히 하고,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up & down 하는 사람, 한결같지 못한 모습이다. 이들은 결코 충성꾼이 될 수 없다. 

성경에 충성꾼을 꼽으라면, 그들이 곧 믿음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참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은 충성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 드려진 그 충성됨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귀한 삶의 열매들이 되었다. 그런 믿음과 충성의 열매들은 곧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저들 자신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음을 본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하나님과 세상, 이방나라의 왕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믿음의 사람, 충성의 사람, 한결같은 사람을 꼽는다면 당연히 ‘다니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부모, 그의 나라, 그가 섬기던 하나님조차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은 많은 일들 앞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가 배운 말씀의 가르침 앞에 한결같아서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삶의 선택이 일정했음을 본다. 환경을 탓하면서, 조변석개(朝變夕改)처럼 변화무쌍해야 상황대처가 탁월한 큰 인물로 쓰임 받을 것 같은 세상가운데서,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바벨론에서 메데와 바사로, 그렇게 여러번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어도, 그는 한결같은 모습의 충성꾼으로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충성할 수 있었을까? 망해버린 나라에서 포로로 끌려왔고 아무런 배경도 인맥도 찾기 어려운 남의 땅에서, 어떻게 그런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까? 

 

변하는 세상, 불변하신 하나님

 

변하는 세상앞에서, 불변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앞에 먼저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에, 그는 조석변이(朝夕變異)같은 이 땅의 일들에 대해서도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한곁같은 충성스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연못위의 부초같은 인생,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 같은 연약한 인생이 한결같으려면 한가지 길 밖에 없다. 요동치 않으시는 반석이신 하나님께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세상과 같이 요동치는 세상의 것에 마음과 몸을 두고 살아가는 데, 어떻게 그 인생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회에서, 젊은 청년이라 할지라도 일을 시켜보면 그의 충성됨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대부분 하는 일을 보면, 대충 눈가림으로 혹은 어쩌지 못해 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세상에 나가서 성공하지 못할 텐데 어쩌나?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시키는 일의 대부분은 교회에 속한 것들이어서, 제대로 하지 못하면 또 다른 사람이 예비가 되어 언젠가는 은혜로 다 되는 일이었지만, 세상에서의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주 냉혹하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하기 어렵고 실패자가 되거나 뜨내기 인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것이다. 결국, 세상에서의 흥망도 결국에는 믿음과 신앙의 문제이다. 신앙이 없어서 이 땅에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과 삶의 승리

 

식당을 경영하는 어떤 분의 이야기이다. 주방 아르바이트하는 이들의 십중팔구는 시간만 채우는 눈가림으로 일하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주인이 일부러 어떤 특정부분을 정리하지 않은 채, 그저 유심히 지켜만 보았다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도 그곳을 출입하며 당연히 눈으로 보았겠지만, 역시나 당연하게 지나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주인이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정리 정돈할 정도의 희생만 보여준다면, 엄청난 비밀 보너스와 더불어 장차 이 사업장을 그에게 맡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치운 사람은 그 주인의 부인이었다는 이야기가 결론이었다. 

종업원이 한결같이 그 주인에게 충성하면, 주인의 것이 자기 것이 될 터인데, 거기까지 가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덜 성숙한 것이다. 신앙의 미성숙이 삶의 성공과 승리를 가로막은 것이다. 남 탓할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세워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교회에 조금 여유롭게 사시는 권사님이 청년들을 초대했다. 모두가 자기들끼리 떠들고 장난치기 바쁜 데, 한 여 청년은 초대한 분의 손을 도와서 음식서빙을 보조하고, 식사 후에는 설거지를 돕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주인 권사님이 한국에서 유학 온 그 여 청년을 훗날 맏며느리로 삼았다. 한국의 집에서 어머니가 중풍병으로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신실한 마음으로 정성껏 봉양하던 것을 보면서, 그 어머니를 돕던 습관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신앙의 가르침이 연결된 것이다. 야단을 친다고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소가 달라도, 한결같은 선한 마음으로 섬길 때에 복이 임한 것이다.

 

한결같은 충성과 헌신

 

어느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은퇴로 인해 후임을 청빙하게 되었다. 원로목사님의 간섭은 딱 한마디였다. 부목사 말고 담임목사 중에서, 참 좋은 분임을 알게 되면, 나가수(가수 경연프로그램) 뽑듯이 하지 말고, 정중히 청하여 모시는 청빙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장로님들이 아주 정의롭게 물었다고 한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빼(?) 오면 그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굉장히 의로운 질문이지만, 청빙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예우를 하게 된다면 서로 서로에게 좋은 과정이 될 것이라며 답을 하셨다는 데, 원로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한 가지는 경연 프로그램처럼 뽑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이 더 많이 개임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다른 한 가지는 담임목회자와 부교역자의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담임목사의 눈에 띄는 쓰레기가 부교역자 혹은 직원들의 눈에는 전혀 잘 보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부교역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정부분, 동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리라, 주님만 내 마음 아시면 되지 뭐, 한국에서 군대만 다녀와도 못할 일이 뭘까? 등등’ 의 이러한 심정들은 담임목회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담임목회자를 경험해 본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한결같음, 하나님의 눈앞에서의 삶에 대해 훈련이 많이 되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한결같음, 기도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인격적인 ‘한결 같음’은 참 귀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복을 받는 통로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한결같음도 대단한 일이겠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다. 요셉의 경우를 보라. 인격적인 탁월함으로 설명하기에는 그가 당한 고난은 너무 큰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붙들린 마음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한결같이 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니엘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원수대적들이 보기에도 충성스럽고 한결같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앞에서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한결같이 붙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니엘은 한결 같이 하루 세 번씩 기도의 무릎을 꿇었다. 한마디로, 한결같이 기도의 끈, 기도의 줄을 붙잡고 사는 것이, 한결같으신 주님께 붙어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사단도 이 정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든지 다니엘로 하여금, 그의 힘의 원천이 되는 기도줄을 가위로 자르듯이 잘라내려고 온갖 술수를 책동했던 것이다. 하필,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니엘이 왕의 칙령으로 인해 기도를 쉬는 것, 그래서 기도의 줄을 잘라내기만 하면, 하나님께 붙어있지 못한 채, 마치 끈 떨어진 풍선처럼, 언젠가는 땅에 추락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단의 지혜가 놀랍다. 다니엘의 힘의 원천, 하나님께 붙어있는 정체, 바로 그것이 기도임을 눈치 채고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기도의 끈을 잘라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는가? 그럴수록 더욱 더, 죽기를 각오하고, 더욱 한결같이 기도의 줄을 붙잡고 나아갔던 것이다.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고도 한결같이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의 충성됨으로 받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한결같은 기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났다. 사자라 할지라도 그 입을 막아버리시고, 더욱 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자신을 모해했던 원수들이 오히려 사자밥이 되어버리는 더욱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세상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선포한 것이다.  

 

풍랑이는 인생의 길에

 

인생 풍랑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한결같을 수 있을까? 어찌하면, 한결같은 충성꾼으로 살면서 그 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께 한결같이 붙어있으면 된다. 한결같이 기도의 줄을 붙잡고 나아가면 된다. 분명히 사단이 그 줄을 끊으려고 책동을 할 것이다. 그때, 물러서거나 포기하면 안된다. 사자굴에 들어갈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줄을 꼭 붙들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한결같으면, 이 땅에서도 한결같을 수 있고, 하나님께 진실로 충성되기만 하면, 이땅에서도 넉넉한 충성꾼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의 조건과 환경 때문에 인생이 되고 안되고가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잘 붙어 있는 삶, 한결같은 충성의 삶, 위기가 닥쳐와도 물러섬이 없이 더욱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사는 자에게 참된 승리가 주어진다. 세상의 환경과 조건을 핑계치말고, 자신의 영적 무릎을 돌아보아야 한다. 거기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0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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