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쟁, 자신을 복종
삶을 전쟁이라고 하듯이 신앙생활 또한 전쟁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새벽을 깨우며 교회 나아오는 것 등이 전쟁 같은 이민의 삶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옛날부터 불통한 인생의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부모 원망하고, 남 탓하고, 다른 사람 핑계대기 좋아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공하는 인생의 3가지 특징도 있다. 하나님께 신실(信實)하고, 이웃에게 진실(眞實)하고, 자신에게 성실(誠實)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축복받은 인생의 출발이 무엇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때, 절로 환경의 문제에서 승리하게 되고, 쉼 없는 사단 마귀의 공격들로부터 당당히 이길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의 표현이다. 성경의 인물들 모두가 전쟁 같은 삶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들이며, 그 전쟁의 중심에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있다.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로마서 7장 22절과 23절에서 전쟁 같은 삶을 고백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자신과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는 영적전쟁의 구체적인 대상까지 지목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1-12)
한마디로, 총칼로 싸우는 전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분명히 존재하며, 먼저 사단을 결박하고 제압하고 정복하지 않으면 땅의 승리도 부재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필승의 삶, 영적전투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 오늘날 다양한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들로 실패와 고통을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실패의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들, 혹은 승리의 기쁨을 맛본 이들은 절대로 패배와 실패의 자리에 다시 서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면서,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다. 이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땅의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의인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그저 편안히 발 뻗고 쉬라는 의미가 아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정복하고 다스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땅에서 적극적인 싸움을 싸우기전에, 영적 전쟁을 먼저 통과하셨다. 광야의 들짐승과 함께 하시면서, 먼저,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을 기억한다. 사단의 세력을 먼저 결박하고, 삶을 시작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에게 모범이 되어주시기 위함이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면, 연전연패(連戰連敗)의 삶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수고하고 애를 써 보지만, 영적승리가 없는 인생은 수고한 후에 토산(土産)의 썩은 열매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신자를 유혹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잠, 게으름, 나태, 무절제, 낙심 등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영적 싸움이다. 그래서 하루의 첫 시간 새벽을 깨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주간의 첫날 주일예배에 승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매일 매일, 영적으로 이긴 싸움을 하며 전심전력 세상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이미 영적 사단의 세력을 정복한 후의 삶이기에 너무나 분명한 필승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좋은 성도의 삶은 정복당하는 삶이 아니라 정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땀 흘려 싸워 이기지 못하면 정복당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바라봄의 법칙
성경에는 많은 전쟁, 정복, 싸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승리도 있고 실패도 있다. 모두가 이기기를 원하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승리의 방법과 길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절대적인 승리의 법칙이 ‘바라봄의 법칙’이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옹성 같은 여리고가 보인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여리고이다. 너무 강력하고 견고하여서 보기만 해도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승리의 빗장을 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아주 단순간결하시다. ‘자꾸만 눈길이 머무는 문제를 보지 말고, 가장 먼저 여리고의 닫힌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 자체를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시편 121편에서 기자는 고백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목해야 할 분은 오직 한분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문제와 믿음의 눈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처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있는 불순물이 없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진다. 동일한 문제 앞에서, 전혀 다른 관점의 해석을 하게 되고, 마침내 그의 믿음대로 일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핏덩이 모세를 낳고 아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영혼의 아름다움, 준수함을 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아름답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런 핏덩이를 앞에 두고서도 믿음을 가진 사람의 눈과 판단은 다른 것이었다. 갓 태어난 모세를 보면서, 먼 미래의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를 함께 그려내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믿음의 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증거도 있다. 나일강에 모세를 띄웠을 때 아이를 발견한 바로의 공주가 단박에 그가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아보았다. 이름표를 달았을까?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남겼을까? 아니다. 살기위해 갈대상자에 담았는데 어떻게 흔적의 증거를 남길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누구 앞에서든지 감출 수 없는, 평생 그들 자신이 히브리 사람임을 증거하는 것은 한가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몸에 새긴 할례라고 할 수 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아이의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도 딴 마음 먹지 아니하고, 난지 열흘만에 아이의 몸에 말씀대로 그 증표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거친 광야같은 세상에서 승리를 맛보게 하며, 자식의 미래까지도 담보하여, 그 가정의 가문을 명문가문으로 세워내는 것을 본다. ‘시선’이라는 찬양이 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본다는 것, 잘 듣는 것.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했다. 믿음만 들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험도 들음으로 찾아온다. 신앙의 내공이 없고, 마음이 공허하여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이 안되어 있을 때는 가쉽거리 소문 한마디에도 그냥 우울증이 와 버린다. 말 한 마디에 잠을 못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타인에 의해 자기 인생이 영향받는 것에 굉장한 주의가 필요하다. 남들 때문에 내 인생의 판이 깨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 때문에 내가 잠을 못자고 남들의 말 때문에 내 인생을 엎어버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잘 들어야 잘 볼 수 있고, 잘 보아야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작은 기계뭉치만 하나 가져도, 그것에 맹신한 나머지, 자신을 대단한 지식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처럼 오해하며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본다.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너무 가볍고 너무 쉽게 흔들리는 갈대같은 인생으로 귀결되더라는 것이다. 어렵겠지만 믿음의 삶을 위해서라면, 전화기와 인터넷부터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본다는 것은 듣는 것을 말한다. 잘 들어야 한다. 잘 들음으로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고, 순종을 통해서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이기게 하시는 승리의 능력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승리, 삶의 승리
여리고와 같은 인생의 장벽들, 성벽을 보지 말고, 문제를 보지 말고, 그 성벽을 무너뜨리실 수 있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모든 무거운 것과 유혹하는 것에는 눈을 감아 버려야 한다. 귀를 닫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오롯이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다. 높은 성만 보지 말고 그 성을 밟고 서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철통같은 요새에서 무기로 중무장하고 방어하는 군인만 보지 말고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못하지만, 나는 연약하지만,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붙여 주셨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크기가 우리 인생의 크기가 된다. 모든 인생은 믿음의 크기만큼 이기고, 누리고,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기 때문이다. 아무 쓸모없는 돌일지라도 미켈란젤로에게 가면 걸작 「모세」와 같은 작품이 나오게 된다. 길가에 버려진 돌일지라도 위대한 조각가의 손에 붙들리면 고귀한 작품이 된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행복과 축복을 위해서는 순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davidnjeon@yahoo.com
05.1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