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산이 썩기 전에, 회복과 축복

-죄, 하나님의 사랑, 예배-
전남수 목사

성경 말씀대로 믿는 신앙을 보기 어려운 시대이다. 각자의 생각이 너무 많고, 그 생각들을 지지할 작은 기계뭉치의 서비스가 놀랍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는 시대가 되어간다. 결국, 그 폐해의 결과는 오롯이 기준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몫이다. 성경은 삶의 잣대(Canon)와 기준이 된다. 많은 감정과 이해가 다를지라도, 기준에 맞추어 삶을 살아가면 마침내 꽤 괜찮은 인생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 눈대중으로 지은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은 지으시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 예배를 받기 위해 지으셨다. 인간 창조의 이 목적은 하나님께는 영광, 인간에게는 기쁨이라는 최고의 복이 된다. 

 

죄된 인생의 회복

 

죄덩어리 인생이 삶을 회복할 길이 무엇인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씻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심과 야망을 통하여 인생을 꽤 폼나게 만들려한다. 그러나 누구나가 맞이하는 ‘임종’의 때를 살펴보면, 결국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고민은 ‘죄’의 문제에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최근 7-8개월을 투병하시다가 천국으로 부름받으신 집사님이 계셨다. 일흔의 연세이면 아쉬움이 남는 나이기에, 온 교회가 회복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애를 썼다. 폐암3기를 잘 이겨내고 암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때,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중환자실을 가시다가 마침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어느날 중환자실에 다시 입원하시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문득 이런 말을 하셨다. “목사님, 제가 죄가 많아서 이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하심의 은혜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분을 부르시고 있고, 그것을 느끼는 가난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 없음을 탓함이 아니라, 인생이라면 누구나 결국 ‘임종’의 때가 되어 지면, 생각나는 것이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씻김 받고 주님 앞에 잘 서고 싶어하는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앞에서는 주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해 지는 것이다. 작은 죄라도 회개하면서, 더욱 예수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그의 공로 힘입어 천국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앞에서 큰 은혜를 받은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임종의 모습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임종의 때에 죽음의 공포가 두려워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피를 흘리면서, 아주 흉측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 믿음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품에 안기듯이 평안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녀들에게도 은혜를 끼친다. 금번, 집사님께서도 임종예배 후에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가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는 가운데 고통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생각건대, 죄의 문제를 두고 주님앞에 더욱 간절히 기도했던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평안’이라는 선물을 죽음을 목전에 둔 집사님에게 주셨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지독한 사랑, 제사(예배)

 

인생이 대단한 듯, 보이지 않는 우주와 미래의 꿈들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죄의 문제와 이를 해결할 하나님의 은혜외에 더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편으로 제사와 예배를 끊임없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제사와 예배를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이 아주 지독(?)하다고 느껴진다. 마치 어린 아기가 김기 약을 먹지 않을 때, 코를 잡고 감기약을 입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아주 집요하시다. 반드시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하시다.

소와 양으로 속죄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집 비둘기를 키워서라도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밖에 나가서 산비둘기를 잡기 어려울 정도의 건강이 어려운 사람도 반드시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이다. 이것도 할 수 없으면 곡식 가루를 드려서라도 죄를 씻는 제사를 꼭 드리기를 원하신 것이다. 얼마나 집요하신가? 그런데,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피가 필요한 법인데, 이를 어떻게 하시는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부분에서도 아주 세밀한 분이시다. 당신의 하신 말씀을 상황과 형편을 따라 이리저리 쉽게 변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위에서 그 곡식을 불사르게 함으로서 곡식의 고운가루로 드린 제물을 통해 충분히 피의 속죄와 같은 은혜를 거두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가난하신 분도  아니신데, 왜 이렇게까지 예배를 받으시려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것은 철저히 죄인된 우리를 위함이다. 분명한 회복과 축복의 통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의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의 용서를 맛보고, 감사하고 즐거워함으로 영혼과 육신이 반드시 회복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제사가 아니고서는 죄를 회개하고 회복과 축복의 자리에 이를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그 지독한 사랑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 마침내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대속의 사랑을 이루셨던 것이다.

 

벧엘로 올라가라

 

숙곳에 사는 야곱의 하나뿐인 딸, 디나가 세겜 족속에게 강간을 당했다. 아들들은 정결의식인 할례를 이용해서 세겜 족속에게 집단 살인으로 복수극을 펼쳤다. 그동안 집짓고 비즈니스 넓히는 재미에 빠져 살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했던 야곱에게 절대절망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단을 쌓고 나를 예배하라”(창35:1) 야곱은 이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 집에 있던 하나님이 싫어할 모든 ‘우상과 헛된 것’을 다 내어버리고, 마음과 몸을 정결히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기로 벧엘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벧엘을 향해 예배하러 출발만 했는데, 그들을 추격하고 공격하며 좇아오는 세겜 사람들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벧엘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성전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이상한 젊은 목사라고 손가락질하는 진짜 이상한 목사가 드러내놓고 행세하는 그런 종말이 되었지만, 말씀의 진리는 인간의 작은 좁쌀같은 이성과 느릿느릿 말 조림에 의해 의거되지 않는 참된 것이기에, 이처럼 믿고 순종하는 이에게는 출발점에서부터 회복과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이다. 망해가는 집안이, 예배드리고자할 때에 하나님은 그 마음먹는 순간부터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하나님의 교회와 예배를 향해 나아갈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에 거짓과 어둠의 장막이 지나가고, 밝고 환한 소망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예배를 팽개치고 어떻게 인생의 축복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이 열립니다

 

24살에 처음 시골 교회 전임 전도사가 되어, 논밭길 사이로 88 오토바이를 운전하면서 열심히 심방을 했었다. 모든 게 신기하고 좋았을 만큼, 혼자 산기도를 다니면서도 두려움이 없었던 용맹무쌍한 전도사 시절이었다. 그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여름날에 어려움있는 가정을 심방했다. 남편 집사님은 대낮부터 한잔하고 얼굴이 벌겋게 누워있고, 아내 집사님은 머리를 싸매고 이불깔고 다른 방에 드러누워 있고, 아이는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듯 힘없이 마루에 걸터 앉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인상깊은 가정이었다. 곧 부부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 아무런 소망의 빛을 발견하기 어려운 그런 가정 집이었다.

대뜸 심방왔노라고 소리를 내고는 예배드리자며 일어나라고 했다. 그때 대뜸 남자 집사님이 소리쳤다. “전도사님, 예배드리면 하늘에서 뭐가 떨어진답니까?” 그때 무슨 용기와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지, 아주 크게 외쳤다. “예 언젠가는 반드시 떨어집니다.”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내 목소리에 놀란 듯, 이리 저리 술도 덜 깼을 모습으로 찬송을 따라 부르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기까지 아주 인상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교회를 잘 출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교회창립기념 화보집을 보내왔는데, 어려움을 잘 회복하고 여전히 교회를 잘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더불어 자손들에 대한 소개도 있는 것을 보며, 가정이 절망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회복이 된 모습이었다. 

나의 짧은 심방과 그 가정의 회복이 그렇게 큰 연관은 없었을 지라도, 그때 이후로 나는 심방을 가면 꼭 하는 버릇이 생겼다. 심방하는 가정이나 사업체가 답답한 마음이 들수록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목사는 반드시 심방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시고 회복과 축복을 시작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긍정, 소망의 메시지만을 전하고 온다는 것이다. 간증을 많이 주셨다. 죄의 문제 뿐 아니라, 어둠의 답답함을 물리치는 힘도 예배에서 시작된다.   

 

빛, 교회와 예배      

 

한국에서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가정을 심방했던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컴컴한 반지하에 사는 가정이었다. 남편은 IMF로 직장을 잃고 누워 있었고, 아내는 가슴과 자궁에 동시에 무슨 큰 수술을 하고서 돈이 없는 중에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집 자체가 빛이 들어오지 못해 그런 측면이 있었지만, 실제 영적으로도 아주 어두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중에 부인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자녀들도 셋이 있었는데, 부인의 말로는 애들이 제일 믿음이 좋다는 것이다. 믿음생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들을 교회가서 놀도록, 교회로 보낸 것이 이유라고 했다. 

그 엄마는 자식들에게 집안의 캄캄한 환경만 보면서 우울한 얼굴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를 가보니, 사람들이 모두 밝고 환하고 친절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애들을 교회로 보냈는데, 과연 아이들의 말과 행동과 얼굴빛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교회에서 잘 자랐다. 부모가 자신의 힘든 환경만 보여준 게 아니라, 교회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 변화와 축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책임이 무엇일까? 자녀사랑의 마음으로 쏟아내는 인생철학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교회와 예배 가운데 노출시켜 주는 것이다. 그때, 그 아이들을 하나님이 친히 키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의 집에는 거하기만 하여도 복이 된다고 약속하지 않는가?(시 84:4) 이후로 “교회와 예배”는 나의 목회철학의 제일화두가 되었다. 교회로 와라, 예배 드리자! 회복과 축복이 나타날 것이다.  

 

토산이 썩어버림

 

이민 목회를 하며, 가정사를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는 가정들이 있다. 게다가 열심히 산다는 핑계에 심방도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며, 열심히 살아 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토산의 열매가 없는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열심히 자녀를 길렀지만 신앙적으로 불신의 길을 가고 있고, 제대로된 일자리도 없어서 근심하며 살고, 이민와서 열심히 사업을 경영하면서 고생은 했는데, 건강만 잃어버리고 소득은 찾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 이들이 너무 많다. 성경의 용어를 빌리면, 토산이 썩었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인생의 나무를 거름주고 키우고 마침내 열매를 수확하게 되었는데, 손에 쥔 열매가 썩어버린 것이다. 

 

회복과 축복

 

알게 모르게 토산이 썩어버린 가정들이 많다. 또한 무감각하여 깨닫지 못하지만, 토산이 썩어가는 가정들이 많다. 이를 회복할 길이 무엇일까? 토산이 썩어버린 가정과 삶이 회복할 길이 무엇일까? 여름이 시작된다. 여러 가지 행사와 프로그램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시 예배의 본질 앞으로, 교회를 중심하여 삶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탁한 현실의 공기를 호흡하지말고, 하늘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맛볼 수 있는, 그래서 생기를 회복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그 생기를 호흡할 때, 절로 자녀들에게도 그 복이 흘러갈 것이다. 맛난 토산의 열매로 만족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4.29.2023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