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유행과 상품화

-미혹의 영, 분별력, 알곡과 본질-
전남수 목사

교묘한 미혹의 영

 

종말의 시대에는 성도를 미혹케 하는 영이 많이 설친다고 성경은 말한다. 요한은 그의 편지글에서 미혹케 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종말의 시대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실체적인 대상으로도 등장하겠지만, 그 연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그 근원이 ‘악한 영적 세력’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단마귀가 그 궤계를 통해 주의 법을 대적하고 주의 자녀들을 허무한데 굴복시키는 힘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데, 그 방법과 내용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교묘한 방법일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진리의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그중의 한 가지 예가 될 것이다. 66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면서도, 어떤 진리에 대한 반향은 각자의 자기 나름의 해석들을 통해 분출한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말에 숫제 말길을 잊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말의 기술이 부족하다 보면,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응대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차라리 그 자리를 회피하기도 한다. 같은 신앙의 진영에 머무는 동지인 줄 알았는데, 자기주장과 고집하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마음을 움츠리게 된다.

신앙의 경구중의 하나가, 악하고 거짓된 것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말 것을 원칙처럼 생각했는데, 이제는 뭐든지 쉽게 접촉정보를 얻어 스스로 보고 듣고 판단을 하겠다는 것이다. 굳이 먹어 보아야 맛을 아는 것은 아닐 텐데, 무엇이든 스스로 해 보아야 알겠다는 시대가 되었다.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판단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한번 믿어보겠다는 것이다. 사단이 사용하는 교묘하고 악한 지혜의 능력이다. 그래서 점차 진리 앞에서도 입장과 견해라는 것을 강조하는 추세이다. 자신이 쌓아온 지식과 경험의 체계를 통해 주님의 말씀 앞에서도 각기 다른 이해와 해석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다. 

 

편리함에 상실된 본질

 

이렇게 세태가 변한 아주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손안에 들어온 전화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전화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자신을 대단한 만물박사 혹은 천하를 가진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작은 기계 뭉치 안에 자신이 궁금해 하는 모든 지식과 정보들이 들어있다고 믿기에, 이것을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터치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알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세상의 정치 뉴스와 건강정보, 이민생활의 지혜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르는 것이 없는 만물박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제는 세상소식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닌, 이제는 영적인 부분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것을 본다. 특히 인공지능 챗봇(Chatter robot)같은 기기의 등장은, 장차 참된 진리를 파수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한 바른 신앙을 전수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 같다.

세상은 본래 편리함을 쫓아 그 발전의 동력을 얻어 계속적으로 진보해 왔지만, 불변한 본질의 영역인 진리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결코 편리함에 따라 살게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편리함을 유혹의 무기로 본질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채팅이 가능한 로봇에게 상황과 조건을 대입시켜 설교를 만들도록 명령해보면 아직은 짜깁기에 불과하지만 어느 정도의 설교문이 만들어지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점점 더 발전하면 어떻게 될까? 사람 목사를 통하여 예배하거나,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난의 일들속에 더욱 주님을 찾고 교회와 예배를 찾아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씀과 은혜를 자판기 로봇같은 것에서 구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신앙의 상품화

 

신앙의 상품화는 코로나와 인터넷을 통해 급격히 확산되었다. 흔히, 코로나로 인해 본격적으로 인터넷 영상예배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정한 장소에서 정한 시간에 검증된 설교자로부터, 예배자들에게 운명적으로 허락된 준비된 말씀이 아닌, 자신의 입맛을 기준한 말씀의 홍수가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편한 것만을 좇는 게 아니다. 불편해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므로 참된 평안을 얻고 누리는 것이 참 신앙인데, 이제는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한 감동을 유발시키는 젓동냥을 구하는 고아처럼 스스로 취사선택하며 듣는 말씀에 만족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근거 없이 말씀의 양식을 취하다 보니, 양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들도 순전하지 못한 것을 본다. 시대를 쫓아가기에 열심인 모습들이다. 말은 그의 속사람을 대변하고, 그 말이 그 삶을 증명하는 법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미혹케 하는 것들을 구별 없이 취하는 시대를 살아가게 됨으로, 결국은 그 좋은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도, 전혀 변화 없는 인생, 열매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영상의 화려함에 흡착해서 오랜 시간 동안 인터넷에 붙들려 살아온 결과, 저들 영혼에는 믿음의 틈새가 벌어지고, 마침내 틈을 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역사를 맛보게 될 따름이다. 

 

잘 포장된 비진리 확산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채, 잘 포장된 영상들이 무차별적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것을 본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새벽마다 울며불며 교회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과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 축복’이라는 용어를 무당의 굿당이나 불교의 사찰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외치는 그런 유명한 인터넷 목사님의 견해를 자기 것인 양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오랫동안의 격리된 인터넷 예배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오염이 되어버린 것이다. 새벽 제단이 어떻게 무당의 굿판에 비유될 수 있는가?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 어찌 샤머니즘사상과 동일시 될 수 있는가? 자신이 선택한 설교자, 자신이 설교자를 지명(?)하여 부를 수 있는, 그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가 이런 악한 열매를 맺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귓가에 들려진 설교는, 그저 자신의 상식적인 신념을 강화하는 지절거림에 불과할 뿐이다. 결코 영혼과 삶을 변화시켜낼 수 없다.

교회에 대해서도 혼돈된 사상들이 너무 범람하고 있다. 교회는 그 자체로는 단순한 건물 혹은 건축물이다. 그러나 그곳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됨으로 인해, 그 건축물은 구별된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성전, 거룩한 하나님의 집(딤전 3:15)이다. 그래서 교회를 향해 나아갈 때는 구별된 시간과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앙행태가 있다. 상황과 조건의 문제로 본질을 흔들어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상을, 예배당에 국한된 제도화된 교회를 추구하는 성속이원론 주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아득한 생각이 든다. 

더불어 영상예배에 대한 염려이다. 영상예배에 익숙하게 되어, 엔터테인먼트 기술에 의해 상품의 질이 평가되듯이 예배와 설교의 영성이 카메라 편집 기술에 의해 우열을 가리는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교회 강단에 실제 목사의 등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시대가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지교회를 세우고 영상을 송출하여, 때로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시킨 무대에서, 예수님처럼 벽을 통과해서 목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한마디로 ‘쇼’하는 강단이 만들어졌다. 유명 대형교회는 매 예배 시간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고 나면, 전화기를 꺼내어 그날 ‘쇼’의 값을 매기듯, 헌금을 결정하여 온라인으로 송금하게 된다. 이것은 실제 영성이 아니고, 가공된 영상일 따름인데, 그러한 가상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참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교회, 수용성과 정당성

 

이와 같은 타락이 일반화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시대는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연세 드신 어르신부터 어린 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일상생활의 정보를 얻고, 이제는 예배까지 이를 통해서 드린다고 하니, 과연 이 흐름의 대세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로컬 교회와 예배를 폐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늘 우리는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 정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의 기쁘신 뜻,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궁구하며 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이 환란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리운 교회로 더욱 힘써 모여야 함에도, 익숙해진 홀로 예배, 홀로 신앙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교회로 오는 것,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헌신하고 봉사하는 교회는 가급적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말씀의 책망도 받지 않고, 들키지도 않는 곳에서 적당히 앉아있다 가면서, 자기는 예배드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변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주의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교회를 향해 나아가며 함께 모여야 한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분별없는 영상물과 사기

 

최근 나름, 한국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목회자의 설교 영상이 떠오르며 마치 선지자의 외침같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예전에 코로나라고 하는 대포로 교회를 쏘아서 교회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했다는 망언(?)을 했던 분이어서 그렇게 놀랍지 않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분에 대해 유혹되고 있기에 소개해 본다. 내용은 이러하다. 어떤 젊은 목사의 설교를 예로 들었다. ‘히스기야 왕 당시에 앗수르 대군이 유다를 쳐들어왔는데,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친히 물리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앗수르 같은 인생의 문제가 찾아올 때, 성전에 올라가 기도해야 한다.’ 이런 설교를 하는 젊은 목사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을 집단적으로 그루밍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새로운 망언에 불과하다.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만난 성도가, 히스기야의 태도에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신앙관이라면, 그는 왜 목회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설교를 감당했을까? 기가 막히는 일이다. 이분의 설교를 소개하는 전문 그룹이 있어서, 이의를 제기했는데, 삭제가 되었다. 더불어 이분 설교의 문제가 될 만한 앞부분을 삭제한 채, 유명하다는 그분의 설교를 올려 조회수를 통한 유익을 얻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것을 짜깁기하면서 충분히 장사 즉 돈벌이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실체가 무엇인가? 영적 사기죄를 지으면서 돈을 버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짧은 짜깁기 영상물에 유혹되어 환호작약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보며, 정말 분별력을 위한 기도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유행따라 신앙생활

신앙생활은 유행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유행의 끝은 허무와 공허, 실패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행을 만들어 내는 적군보다 더 교묘하게 우리 진지를 허무는 내부의 적들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이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회복하면 나머지는 성경의 언약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무슨 종이로 포장을 해도 다이아몬드이다. 본질은 그 자체가 알곡이기에 무엇인가를 더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은 아무리 진리의 본질이 옳아도, 포장지가 부족하다 싶으면 쉽게 내쳐버린다. 그리고 너무 쉽게 본질을 치부하며 말한다. ‘목사님, 그것은 전통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꼰대 같은 소리입니다. 요즘 젊은 MZ세대를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단정하듯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전통, 혹은 꼰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삶의 이해와 진실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본질을 찾는 법임을 잘 기억해야 한다.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오직 참 진리만이 존재하는 때가 도래한다고 할 때, 그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알곡이다. 숫자와 보이는 현상의 화려함이 아니라, 알곡, 본질을 말씀하는 것이다. 먼 훗날 그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에, 주님이 찾으시는 그 본질, 그 알곡을 얼마나 준비하고 예비하며 삶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 가짜가 너무 많다. 화려한 포장지가 물건 알맹이 보다 더 제품의 선택과 가격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맹이는 없고 포장만 화려하면, 그것은 그냥 ‘사기를 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가 아니라, 포장에 담긴 물건이다. 그 물건이 바로 본질이다.

davidnjeon@yahoo.com 

03.2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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