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구별
성경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음을 말씀한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원리를 볼 때도, 동물은 인간과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동물은 인간의 다스림속에 존재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할 수 있도록 지음받은 존재이다. 동물 스스로에게는 ‘다스림’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림의 사자가 아무리 강해도 다른 동물들을 본능에 따른 약육강식의 힘으로 지배를 할 따름이지, 동물의 왕인 사자가 밀림을 잘 다스려 아주 평화롭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정치를 하거나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런 다스림의 능력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의 국가론과 같은 책을 보면, 인간만이 가지는 다스림의 정치에 대한 탁월한 지혜를 보고서 놀라게 된다. 어떻게 그런 고대시대에 그런 사상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창조의 때에 인간에게 주신 ‘다스림의 축복’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 혼합될 수 없음
동물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 사랑이 결코 그 동물을 사람과 동일시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까지 가면 안 된다. 갈 수가 없다. 심리학에서는 원숭이 같은 동물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 복제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간과 DNA 단백질 구조가 가장 비슷한 돼지를 통해 연구하며 그 성과를 기대한다. 이러한 동물을 통한 연구가 성공해서, 마침내 인간복제까지 성공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생각해본다. 간절히 필요한 이들에게는 복음이 되겠지만,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인간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기 생산용으로 인간을 복제해서, 마치 자동차 부품 판매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듯이 간, 콩팥과 같은 장기를 판매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후에는 부정모혈로 지어진 인간이 아닌, 돼지의 변종으로 인간 자체를 만들어내지도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끔찍하고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대가 아무리 이렇게 혼돈된다 하여도, 성경을 변개하면서까지 바라볼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경은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일 따름이지, 이것이 결코 섞여 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결코 동물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험의 한계와 믿음
동물들은 먹는 것에 구분이나 기준이 없다. 일단 먹어보고, 본능과 경험의 감각으로 배우게 될 따름이다. 먹고 죽지 않으면서 배를 불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먹고 배불리려고 하는 것이 동물이라는 존재이다. 동물이 스스로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해서, 슈거프리 설탕을 먹거나 단백질이나 칼슘을 선별해서 먹지 않는다. 그렇게 먹을 수 없다. 죽은 시체까지도 먹는다. 사자가 먹고, 하이에나가 먹고, 들개가 먹고,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먹고, 나중에는 개미와 벼룩까지 등장해서 뼈만 남기고 먹어 치우는 것을 본다.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인간이 굳이 먹어보고, 감각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사람은 경험이 아니어도,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마치 동물이 하듯이 모든 것을 경험해봐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의 삶은 사람답지 못한 짐승 수준으로 곧 전락하리라 생각된다.
예전의 어느 작가의 딸이, 예술 퍼포먼스를 위해 돼지 똥을 온 몸에 바르고 돼지 우리에 누워있는 예술(?) 사진을 본적이 있다. 이해하기 어렵다. 굳이 해 보아야 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해 봐야 나쁜 것임을 알고, 죄를 지어보아야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사람답지 못한 동물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사람을 추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본 것이다.
순종과 복종의 축복
강원도 철원의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할 때였다. 지뢰가 매설된 곳에는 빨간색으로 접근 금지 간판이 걸려있다. 들어가지 마라.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표시이다. 그런데 그곳은 한국전쟁 이후 한번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기에, 유혹거리들이 꽤 있다. 특히 시골출신들은 칡뿌리 캐는 것에 열심을 갖고있다. 영하 2-30도까지 떨어지는 곳에서, 한겨울 새벽에 보초를 나갔다가 돌아와서 난로위에 끓여 놓은 칙차 한잔을 마시면 얼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칡뿌리 같은 것만 보이면 거의 환장(?)을 하게 된다. 게다가 가끔 사슴이라도 나무 엉치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 지뢰에 대한 경고판은 뒤로하고 가지러 들어가게 된다. 결국, 잘못 발을 디뎠다가 다리을 잃어버리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와 같은 불행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가 있지만, 들어가 보고 나서야 이것이 잘못되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너무 바보같은 짓이다. 죄를 지어보아야 죄의 열매가 쓴맛임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 함께 들어 있다. 이것을 알고 지킬 때에 복을 누리게 된다. 사고를 저질러 보지 않고도 미리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음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된다. 탕자 아들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어보고서야 아버지 집이 그립고 좋은 줄 안다면, 참 어리석은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이 쉽지 않고,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한다. 죄를 범한 인간은 아담과 하와처럼 웬만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죄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킬 것을 지킴이 복
지킬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면, 미리 먹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경험으로 안다는 것, 이것은 동물들처럼 굉장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맛보고 경험한 그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여자는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아야 했고, 남자는 땀을 흘려서 일해야 하는 데, 일터라는 곳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그런 땅이라고 하면 아마 땀 흘릴 때마다, 후회 가득찬 시간들을 보냈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어보고 나서, 죄가 무섭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깨닫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성경에 금지한 것을 하지 않음이 축복이다.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축복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자에게 주의 은혜가 따라 다니게 될 것이다.
영적 거주지에 머물라
하나님은 먹는 것 뿐 아니라 머물러 살 곳, 거주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물론, 동물들은 거주지를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다. 인간이 제공하는 안락한 문명 속에서 훈련이 되어 가만히 있을 뿐, 자연 상태의 새와 짐승은 어디든지 마음대로 자신의 원하는 대로 옮겨 다니며 살아갈 수 있다. 야생의 세계에서 짐승들의 움직임을 보라. 결코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다. 본능이 저들을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삶의 거주지를 일정하게 하여 사는 것이 복되도록 하신 것이다. 에덴동산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축복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지 않았던가? 미주 이민사회에, 마치 평생에 걸쳐 50개주에 한 번씩은 다 살아볼 것처럼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이유에서다. 개인적인 삶의 실패와 방황의 일들, 경제적인 문제, 가정과 자녀의 문제 등등. 이유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삶에 결코 아름답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치 연못 위에 떠다니는 부초같은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위해 정해주신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거주지가 일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복있는 인생을 살아 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시 84:5). 영적 거주지, 하나님이 정하신 영혼의 평안한 좌소, 하나님이 지정해두신 곳에 있는 것이 축복이다.
머무는 축복을 지킴
폴 틸리히는 ‘인간은 자기가 머물 곳에 머물 때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육신도 그러하겠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장소가 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 기도의 역사가 있는 곳이 있다. 주님의 교회에 모여야 한다. 모여서 예배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축복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는 영적 거주지를 자꾸만 이탈하도록 유혹함을 본다. 히 10:25의 말씀을 거슬러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들을 더욱 좇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두고서도, 교회 밖에서 예배하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결국 교회와 예배가 무너지는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목사님들은 교회를 개척을 하고서, 처음 3년 동안에 교인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모님을 홀로 앞에 두고서도 새벽예배부터 주일 오전 주일 저녁, 수요 금요예배까지 인도하며 혼자 찬양하고 설교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서도 예배의 시간을 지켰고, 그런 어려운 시간들이 지나면서 한명 두명 모여든 알곡같은 개척초기 멤버들로 인해 큰 부흥을 맛보았다고 한다.
정한시간, 정한장소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이 이유가 되어, 교회가 스스로 예배를 줄이고 폐하고 마침내 교회문을 닫는 형태가 너무 흔해졌음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84:5)고 축복을 약속하여 주셨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영적 주거지에 모이지를 못하니, 아무리 하늘과 땅에 좋은 복을 예비하였다 해도,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연어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인생이 영적 주거지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힘써 지키며 나아갈 때, 마침내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귀하고 놀라운 은혜의 축복들이 주어질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2.1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