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유한한 인생
인생을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하지만, 성경의 정의는 다르다. 성경의 비유를 보면, 살 같이 빠른 인생, 아침 안개와 같은 인생, 들풀 같은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100미터 단거리 전력 경주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유한함 들을 묵상하다 보면, 불신자들이 인생의 허무와 공허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려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말도 조금은 이해가 될 법하다. 무한의 영원과 잇대어 있지 못한 짧고 유한한 인생의 절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가 짧고 유한한 인생의 여로지만,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잇대어 그의 부탁하신 사명과 연결될 때, 인생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사명은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깨달은 사도 바울 같은 이들은 아무 미련없이 자신의 짧은 인생을, 영원하신 주의 사명 앞에 내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주님과 함께 열심히 전심전력으로 달려갔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을 드렸다. 큰 환란과 핍박이 연속되었던 삶이었지만, 그는 지치지 아니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지막 피니쉬 라인을 전력으로 통과하는 100m 선수처럼 그렇게 유의미하고 멋진 삶을 살아내었던 것이다.
이처럼 멋진 인생,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분명한 사명을 목표로 전심전력하는 경주임이 분명하다. 결코 한가로울 수 없고,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중무장하고서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열심히 전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로 살려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분명한 뜻이며, 유한한 인생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전도와 교회부흥
주님의 사명을 생각하면, 복음전도와 교회부흥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보고서를 취합해보면, 교회마다 전도가 많이 정체되고, 성장하는 교회로 평가되는 교회들도 수평이동 교인들의 증가 정도에 그친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전도와 부흥이 그렇게 정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대의 타락과 더불어 먼저 믿은 주의 권속들이 사명의 말씀 앞에서 그 원리를 떠났기 때문이며, 성경이 말하는 종말 시대의 현상들 앞에 무참하게 무릎꿇는 존재가 되어버린 탓이라 여겨진다.
성경은 종말현상을 자기 사랑과 돈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먼저 말씀한다. 사명과 상관없는 삶의 설명들이다. 마땅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마땅한 부흥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저들의 관심거리가 오직 ‘자기 자신과 돈’에 있고 사명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다. 말씀의 원리를 떠나 살기에 ‘성경대로 전하는 삶, 증인된 삶의 사명’에 대해 간절함이 없다. 고민도 없다. 그 결과 결국 교회는 새 생명의 부흥, 생명의 산실이 되지 못하고 마치 아이가 출생하지 않는 산부인과 병원의 마지막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사명앞에 내려놓음
사명앞에 삶의 우선순위를 분별하며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세 가지 종류의 신자가 있다. 교적부에 등록된 이름을 두고 칭하는 ‘교인’이라는 이름이다. 또한, 교회만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거룩하게 살고 열심히 믿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일컫는 ‘성도’가 있다. 그리고, 참된 성도, 주님이 세우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제자’를 말할 수 있다. 제자는 주를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삶에서 주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로 제자이다.
모든 신자는 교인, 성도의 단계를 거쳐 제자가 된다. 주님의 꿈, 주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제자로 사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만 출석하는 교인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영적으로 성장해서 성도가 되고, 나아가 반드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됨을 통해서만이 참된 사명자, 복음 전도와 교회 부흥을 이끌 수 있게 된다. 제자 됨은 주님앞에서 결단과 순종, 강제 포기와 같은 내려놓음의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제자가 되기 원하지만 이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다. 무관심의 불감증, 만사를 귀찮게 여기는 것이다. 편리함에 모든 강조점을 두고 사는 것이다.
무관심 불감증, 귀차니즘(?)
미국에서 꽤 잘 산다는 동네에 위치해 있는 교회에 신년 집회를 위해 다녀왔다. 삶의 여유로움이 있고, 대형교회들이 시스템을 잘 세워 둔 지역에서 꽤 특별한 목회를 하시는 교회였다. 어떤 면에서 신앙생활이 편하지 않는 교회였다. 학교 미술선생님 하시던 분이, 신학교를 가서 목회를 하시다 보니, 모든 것이 꼼꼼하고 철저해서, 별명이 ‘디테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다 보니, 예배와 교회 전체의 움직임들도 느슨해 보이는 것이 없다. 한마디로 삶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찾을 수 있는 지역에서, 아주 불편해 보이는 목회를 하고 계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전도를 위해, 누가 누가 더 편하게 해 주는가? 로 경쟁을 하는 것 같다. ‘편하게 예수 믿으세요. 우리 교회 오면 잘 차려진 코스요리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녀 케어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 교육과 상담 등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최고의 선생님으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등등’ 마치 유치원 광고처럼 사람들을 흡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중에 방문한 이 교회는 예배가 2시간 반을 넘긴다. 설교만 한 시간 반을 지나간다. 강해 설교 한 권을 3년이 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는 다른 어떤 큰 교회에서 느껴보지 못한 은혜가 있더라는 것이다. 작지만 강한 교회였다. 게다가, 장로님 한 분의 헌신으로 교회당을 매입하고, 매입액수보다 더 큰 공사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잘못된 업자를 만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보통 교회 같으면 난리가 나고, 교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액수였지만, 어느 누구도 담임목사님을 힘들게 하거나 어렵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보면 드러나는 훈련된 은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혜를 전하러 집회 차 방문한 본인이 오히려 옛적 일을 기억하며 많이 배우고 돌아왔다. 한마디로 명품 목사님과 명품 성도들이 세워 가는 교회였다.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지역에서, 삶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더 편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그런 대형교회를 두고 왜 이 고생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한마디로 본질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씀 속에서 참된 진리를 선포하는 데, 주저함이 없음에 그 영혼들이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편리함, 회개와 후회
우리 지역에도 가급적 편하게 해주는 교회가 있다. 미국교회이다. 미국교회에 한인이 가게 되면, 언어의 문제만 있을 뿐 너무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교회 나아오는 복장도 자유롭기 그지없다. 목회자부터 반바지에 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강단을 뛰어다니는 데, 성도들은 얼마나 편리할까? 헌금의 부담도 없다. 본 교회에서는 중직자들은 반드시 기명으로 예물을 드려 성도의 모범이 되라고 한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어도 교회와 사역자와 구역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마땅한 모습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미국교회를 출석하게 되면 모든 예배, 새벽예배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점심 친교준비를 위해 집에서도 잘 하지 않는 밥을 하기 위해 손에 물을 적실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편리함을 찾아 미국교회를 적절한 중간 스테이션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본 교회에서는 미국교회 다니는 성도들을 전도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조금 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고 권면하는 가운데 있다.
그렇게 편리한 시스템을 가진 유수의 대형 한인교회들과 미국교회내의 한인들, 또 그들과는 다르게 생활하는 집회 차 다녀온 그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해보았다. 다 같은 주님의 몸된 교회,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이고, 한 하나님, 한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고 할 때, 주님의 기쁨, 칭찬, 인정, 상급의 대상이 되는 교회와 성도는 어디일까? 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편한 세월 다 지나고 누구나가 직면하는 임종의 때가 찾아올 것인데, 그때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편한 교회를 찾고 찾아서 신앙생활하고 나타난 성도와 그렇게 열심히 성도들의 편의를 봐주었던 목사님이 주님 앞에서 딱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를 생각해 본 것이다. 서로 후회스럽고 서로 민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를 위해 땀 흘리고 수고하며 헌신할 기회를 주지 못하고, 그저 편리함에 물들도록 교회를 경영(?)했다면, 주님 앞에서 책망 받을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대형교회여도 최선을 다해 목회하시면서, 성도들을 꾸준히 무리가 아닌 제자 됨의 자리에 이르도록 훈련하는 모범이 된 교회도 있다고 생각된다. 본인이 알고 있는 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다. 그러나 한편, 코로나 이후의 목회 현실은 점차 편리함이 교회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격화될것 같은 마음에 안타까움이 찾아든다. 이를 회복할 길은 무엇인가?
풀꽃 인생, 불꽃처럼
짧고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를 회복할 길은 사명의 재무장밖에는 없다. 삶에 지루함이 있거나,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기 원할 때 권하는 비법이 있다. 생짜배기 비 그리스도인에게 찾아가서 열심히 입으로 복음을 증거 해 보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열매인가를 확인할 것이며, 다음으로 그렇게 무미건조해 보이는 우리의 입술이 증인 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가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제자들의 삶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고생, 수고, 눈물을 당연히 여기는 증인된 사명자의 삶이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감동을 전달하던 자가 아니요, 자신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던 자들이 아니요,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현장 속에서도 저들은 오직 사명 앞에서 멈춤이 없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논리와 방법이 난무하는 시대 가운데 살고 있다. 이 모든 시대의 논리와 합리성을 떠나,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짧고 유한한 인생을 사명에 붙들어 매어야 한다. 현장에서 입을 열어 전도하고, 주를 위해 아픔을 당하고, 욕먹고 그렇게 할 때, 가장 먼저는 우리의 신앙이 생기를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신 기적의 현장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2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