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 새 부대, 생명을 담고 나누는 교회

전남수 목사

뚝배기와 장맛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있다. 뚝배기의 존재 목적은 장맛을 위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인데, 형식이 좋아도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의 맛에 방해가 되는 뚝배기라면 제 아무리 예쁜 것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포도주와 부대에 비유하면, 부대가 너무 낡아서 귀한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면 결국 그 용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것을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 당신, 복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를 새 시대의 새 부대에 담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생애 사역 내내, 당신의 생명의 복음을 나누고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셨다. 복음을 담고 나누는 그릇,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필요로 함을 말씀하시면서, 신약교회가 예수의 생명을 담은 참된 부대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신약교회에 예수 생명이 가득 찬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는 예수님, 예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하고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 생명을 노래하며 전하는 곳, 예수 생명의 향기가 진동하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새 부대, 교회와 언약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지나시면서 기존의 성전이 무너지리라고 선포하셨다. 예수 생명의 복음을 담아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3세에 성전에 처음 가셨을 때부터, 그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다. 그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한마디로, 본질을 상실한 그릇 껍데기는 아무 의미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바친 성전이라 하였는데, 그 아버지의 보내신 아들을 거부하는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김이 없이 다 무너짐이 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가진 영광이 아무리 화려하고 빛나 보여도, 예수님을 거절하는 교회는 그 자체로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월이 가면 허물어질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으로 충만한 영원한 집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대로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예수의 영,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들 120문도를 향해 유대인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했는데, 정확한 말씀의 성취였다. 새 포도주되신 주님의 영광이 임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그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 생명의 복음을 담고 나누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생명의 새 부대를 만든 것이다. 옛 것이 낡아서 새 것을 대신하고,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성취된 것이다. 

 

참 생명의 복음과 교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진리는 항상 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생명을 간직한 가르침이기에 쇠퇴하거나 낡아지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기쁨과 환희가 있다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손길을 거친 성경의 교훈이 오늘날에도 항상 새롭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누구나 복음이 항상 새롭게 다가오고, 그 인생이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이 가르침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의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고, 새로운 감격속에 많은 전도자들이 피끓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능력(DIUNAMIS)의 복음으로 증거되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조건에 있어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기적 같은 주의 은혜가 저들의 삶 가운데 온전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왜 포도주에 비유했을까? 포도주의 붉은 빛은 피를 상징한다. 성경에서 피는 곧 생명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 참여함이요, 예수님의 피에 참여함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 된다. 그 성찬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생명을 받아 먹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다. 새 포도주 되신 예수 생명을 담는 가죽부대로서 예수님의 생명을 잘 받고 보존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포도주를 담은 가죽부대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부스러지게 된다. 예수 생명을 모신 공동체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생명은 영원한데, 부대는 낡아져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화되고 고착화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포도주의 생명력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구약의 성전 뿐 아니라, 지금 현대의 교회의 모습들도 복음의 그 새로운 능력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엄청 역부족이다. 

결국,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복음의 싱싱한 생명력을 담아내지 못할 때, 낡은 포도주가 버림을 받듯이 버려지고 말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과연 나와 주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을 새 부대로서 늘 새롭게 준비되어 가고 있는가? 힘들고 어렵지만, 개혁의 과정을 지나면서 날마다 새롭게 예수 생명을 넉넉하게 품어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보인다. 

 

교회환경의 변화 앞에서

 

코로나를 지나면서 교회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한국의 유명 강사 목사님들이 집회 때문에 많이 바빠졌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밖으로 잘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왠만한 지역 목회자들이나, 교단내에서 활동하는 목사님들은 명함(?)도 잘 못 내 놓는다는 것이다. 교회의 유익함을 떠나, 일단 유명한 가수나 탤렌트 등의 이름이 알려진 간증자들이나 이름있는 목사가 아니고서는 관심 자체도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관심을 끌기에도 부족한 곳이 되어버린 세태가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타주에 있는 규모있는 교회를 교역자들 수련회를 겸해 방문하게 되었다. 담임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로 교회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데, 정말 모든 교육시설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였다. 목사인 나도, 이 도시에 이사를 오면 이곳에 아이를 보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평신도들의 경우는 얼마나 그 마음이 더할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주님의 원하심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했던 교회의 잘못을 말함이 아니라, 잠시 잠깐 들었던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가?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 뜻 없이 어떻게 복음의 부대들이 곳곳에 이토록 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주님의 뜻이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뜻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실제 이 지상의 모든 교회는 큰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찌감치 문을 닫아야 마땅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분명히 크든지 작든지, 교회는 그 자체로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존재 근거

이 지상에서 사이즈를 떠나, 모든 크고 작은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본질을 생각하면 답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집이 가난해도, 그 집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가족이라면 그들을 가리켜서 명문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온 식구가 김치하나 밥 한 공기를 두고 둘러앉았다 하여도, 아버지 먼저 숟가락 드시기를 기다리는 가정은 명문가문의 싹을 보여주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다. 작고 초라한 외관이어도, 사람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도,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있다면 그 교회는 명문 교회이며, 새 포도주의 새 부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외관이 훌륭하고 좋아보여도, 예수 생명의 복음에 터치되지 못한다면 주님이 버리시는 낡은 포도주 부대가 될 뿐인 것이다

 

본질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느 대형교회 부교역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좋은 시설과 환경에다가, 모든 사역 조건의 부족함이 없고, 성도들도 교회 오기만 하면 교회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곳임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시스템의 축복은 누리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생명 복음의 본질이 터치되는 현장을 놓침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와 중간교회도 있고 여러 형태와 사이즈의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 사이즈는 하나님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고 누리고 나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이즈는 그저 낡아질 가죽부대와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잘 담고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이즈는 상관이 없다. 큰 교회라고 이상한 눈으로 볼 것도 없고, 작은 교회라고 무시할 것도 없다. 오직 한가지, 예수 생명의 복음을 잘 담고 있으면, 크다고 타락하지 않을 것이며, 작다고 해서 왜소한 마음 가지지 않을 것이다. 작지만 나는 복음의 뼈대있는 명문 교회에 다닌다고 더 자존심 쎄게 교회자랑하지 않겠는가? 큰 교회, 중간(?) 교회, 작은 교회, 아주 작은 교회, 모두 주님의 생명복음의 포도주를 담고 나누는 새 부대가 되면 되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14.2023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