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교회사랑, 교회개혁 1

전남수 목사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해서 교회마다 종교개혁의 표어를 강조합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 교회는 무엇이며, 개혁은 또 무엇인가? 삼십년도 더 된 오래전 이야기이다. 신앙의 선배 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개혁에 대해 열심히 특심한 분이 계셨다. 그가 어느 날 교회 담벼락에 대자보를 붙였다. 내용인즉, 교회가 재정을 투자신탁 회사에 맡겨 이윤을 보려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헌금을 가지고 투기를 할 수 있느냐?가 주된 내용이었다. 당회가 이를 설명했고 갈등하면서도 설명에 서로 이해를 하는 듯 했다. 헌금을 가지고 이윤을 보려고 투자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쪽과 어차피 교회가 일반은행에 맡겨도 이자를 받게 되는 간접투자가 아니냐는 설명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면, 모두 이해가 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견해는 교회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에는 교회개혁의 좋은 표징으로 삼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목회자의 사례와 세금 문제, 교회운영의 민주적 정당성 등을 업급하면서,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여러 측면에서 교회를 앞서 이끌어가는 당회와 젊은 성도들간의 불협화음들이 충돌과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교회중심의 삶을 지향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당시를 회상해보면, 뜻은 좋았지만, 교회개혁에 대한 조금 더 성숙(?)한 입장을 취하였더라면 하는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교회의 공공성이 세상 앞에 아름답게 드러나 본이 되며, 모든 성도들에게도 항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고 복되게 세워져야 할 주님의 교회가 몸살을 앓듯이 분열하고, 마침내 세상 앞에 부끄러운 치부를 까발리듯이(?) 세상 앞에 드러내어서야, 과연 진정한 개혁, 개혁으로 말미암아 더욱 아름다워진 교회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혁은 마치 상처의 고름을 짜내는 심정으로 해야 되고, 그런 썩은 고름을 잘라낼 때, 그 지저분함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항변한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출발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즉, 교회를 개혁하자는 구호에 앞서서,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충만할 수는 없을까?하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참 마음으로 개혁적인 주장과 행동을 한다고 할 때, 혹여 때로는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선한의도가 주님의 마음에 열납된다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몇 번에 걸쳐서, 종교개혁의 시즌에 참된 교회개혁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출발점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되기를 소망하며 교회를 위한 복된 관점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찾아보고자 한다.

 

1. 교회를 운명처럼 사랑 

 

이민사회에서 교회와 성도들의 생활을 볼 때, 이 교회가 평생 내가 섬길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도 이 사람과 내가 살수도 있고 언제라도 헤어질 수도 있는 관계, 깊이 사랑하지 않고도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는 관계, 그런 관계들은 각자의 인생에 불행하다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항상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좋을 수는 없겠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이 사람은 내 운명이다, 평생 생명 바쳐 사랑할 사람이다.’ 그 믿음의 약속을 지켜가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상 교회가 가지는 작은 허물과 연약함에 결코 교회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 만나면 끝이 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운명을 만났는데 인생이 왜 변하지 않겠는가? 교회를 향한 순전한 이 믿음 위에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신다. 아무리 좋은 요리도 개 밥그릇에 담으면 결코 사람의 밥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아름답고 정한 그릇 위에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담아 주신다. 광야인생길에 힘들고 지친 인생을 온전하게 세우는 사막의 샘물이 공급될 것이다. 만나의 광야를 먹게 된다.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시게 될 것이다. 이 교회는 내 운명이다! 이처럼 영화로운 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마음에서 모든 교회의 개혁과 회복은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2. 교회는 신령한 공동체

 

교회에 모이는 것은, 단순히 교회라는 빌딩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모이자는 고백과 믿음의 행동이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는 모든 좋은 것이 들어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이는 것은 그런 복되고 좋은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많이 좋아해야 한다. 교회 가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어야 한다. 모든 삶의 중심이 말씀과 성령, 예배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의 시작이 아닐까?

삶이 하나님 중심에서 멀어져, 언제나 자기 생각을 기준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없음을 본다.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생각대로 하면 박수치고, 예수님이 내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얼굴이 변한다. 마치 가룟유다가 예수님앞에서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의 믿음을 보고서도 자기 생각으로 어긋난 판단을 하는 것과 같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왜 쓸데없이 예수님께 붓느냐고 말한다. 예수님을 섬겨도 자기가 이해되는 선에서만 따르려고 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자기가 이해되지 않으면, 안 따라가고, 이해되면 따라가므로, 늘 자기의 능력 안에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사람이다. 결국 복 없는 결론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인생이 될 따름이다. 

교회는 결코 인간의 이해 가능한 보편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기초한 신령한 은혜의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혜의 보좌 교회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렵고 피곤하고 고통스러워도, 피곤할수록, 힘들수록, 교회를 향하여 눈을 들어야 한다. 힘든 일이 생겨서 잠이 오지 않으면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주님이 부르시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거든, 기도하러 교회로 가보라. 걱정과 근심들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을 얻게 될 것이다. 교회를 주님의 집으로, 주님의 품으로 믿고 나아오라.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교회를 통해 주님을 만난다. 나아가기만 해도 주님이 답을 주신다. 이런 신령한 공동체가 교회임을 믿을 때, 교회를 향한 모든 개혁적인 소원과 소망도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을까?

 

3. 교회를 따르는 것이 복

 

말씀에 기초를 두고 교회가 정한 것도,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율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예를 들어 십일조가 율법이고, 주일 성수가 율법이고, 새벽기도도 율법적이어서 동의 못한다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들은 말씀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열심 있는 주장을 따라 살게 된다. 결국은 어떤 인생이 되는가? 말씀에 정한 법에 순종이 없기에, 예비하신 복 과도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에게는 방종이 자유와 진리이다.

몽학 선생된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와 복음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율법에 대해,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은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몽학선생을 따라가다가, 이 모든 것이 섭리요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마침내 은혜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장님같이 분별없던 깜깜이 인생이 타인의 손에 끌려서 교회에 왔고, 그때부터 교회를 통해 교회를 배우게 되며, 마침내 다른 영혼을 인도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를 출입하면서 하나씩 둘씩 배워간다. 성경공부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하지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배웠다. 배워두는 것이다. 따라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새벽기도 나오십시오’하면 그렇게 따라 나오고, 그러면 새벽기도의 축복을 맛보고 누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미국식이냐? 한국식이냐? 따지기 전에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하는 것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들로서 충성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말처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를 잘 따르는 복된 자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를 배우고, 교회를 따르며, 교회 앞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혹자는, 은혜받으면 다 된다고 말하고, 은혜받기 이전엔 뭘 몰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말씀을 배우면서 은혜를 받아야 빗나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배우는 기간이 50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언제나 한결같이 배우는 자세를 가진다면, 언젠가는 폭발적인 은혜를 부어 주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50년 60년 예수를 믿어도 한결같이 잘 배우지 못하니, 은혜를 말하여도 삶은 갈짓자(之)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움의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은혜받으면 다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잘 따르고 배워야 한다. 그렇게 배우다 보면 되는 것이다. 개혁을 원하는가? 교회 앞에 순종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보라.

 

참된 개혁의 사람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이다. 교회가 중요하다. 혹자는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면 돼지, 왜 눈에 보이는 교회가 필요하냐고 질문한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걸치는 옷이 필요하다. 육신의 몸을 앉힐 의자가 필요하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음식을 통해서 얻기에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몸을 움직여서 땀흘려 열심히 일을 하고 하나님 섬기는 사역과 사명도 감당하며 이 땅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일날 침대에 누워서 머릿속 상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그것은 귀신놀이를 하는 것이지 결코 신앙생활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손으로 잡고 만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교회를 사랑한다. 교회에서 배워야 한다. 이것이 참된 개혁의 출발점이 된다고 여겨진다. 교회개혁을 원하는가? 먼저 교회를 진심으로 참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가 바로 참된 개혁자가 아니겠는가? 

davidnjeon@yahoo.com 

11.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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