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다섯 살 난 딸이 하나 있다. 마냥 해맑고 사랑스럽게 웃기만 하던 아기가 어느덧 수백 일을 들숨 날숨 부단히도 호흡하더니 이내 세상 공기를 제법 마신 인간의 구색을 맞추어 가며 끝없는 질문과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아이를 낳기 전까지 7년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신다면 가장 귀한 보물인 신앙의 유산을 꼭 남겨줄 수 있기를 기도했었다. 그러나 딸이 자라가며 그 아이가 오롯이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소용돌이에서 헤엄치는 동안, 나 역시 일상에서 민낯으로 드러나는 나의 투박한 물장구 속에서 복음의 반짝이는 빛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때로 무지했고, 종종 무관심했으며, 자주 무력감을 느꼈다. 모든 부모가 두려워하는 사춘기가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여전히 내게도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 내지는 일종의 반발심과 원망감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마음 깊은 곳에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아이에게 어떠한 진심과 설득력으로 신앙을 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다만, 이러한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부터라도 찬찬히 내가 믿고 붙잡는 복음을 정리해보자는 용기로 의지를 다졌을 때 접하게 된 책이『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였다. 처음에는 저자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이고, 아이들과 신앙에 대해 기꺼이 대화하는 분이라기에 조금은 낮은 눈높이에서 쉽고 가볍게 읽을 만한 기독교판 즉문즉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묵직한 추천인들과 그들의 추천사를 거쳐 목록을 훑는 순간, 이것이 어린 딸을 무릎에 앉혀놓고 재밌고 교훈적인 성경 구연동화를 들려주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껏 머리가 큰 사춘기 딸이 들이밀 서슬퍼런 이성과 감성의 질문 끝에 따뜻한 지혜와 균형잡힌 감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신앙의 방패들이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저자는 크리스천이자 의사로서 지성을 쌓아가는 과정, 수술대에서 의료 행위를 시행하는 과정,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의 신앙 전통과 선교 현장에서의 신앙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풍성하게 제공한다. 딸의 예리하면서도 다채로운 질문의 스펙트럼을 포용하고 그 안팎으로 공감과 가르침을 동시에 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먼저 믿은 아버지로서 얼마나 책임감 있는 신앙의 걸음을 걸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스스로가 책에서 강조한 “생각없이, 관성대로 굴러가는 태만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주시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아비된 자로 마땅히 공부하고 가르칠 것들이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땅에 함께 서 있는 자로, 한 발 먼저 디뎌본 자로 우리는 이들에게 역사와 전통의 흐름을 일깨워주고 함께 발맞춰 걷는 법을 배우며 옳은 곳으로 손잡고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책 읽는 내내 자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세상이 지적하는 기독교 역사의 폭력성과 호전성에 눈가리고 아웅하기보다 해석의 역량이 낳은 오해와 실천적 방임이 나은 실패를 직시하고 기독교의 소망과 성찰을 동시에 설파했다. 또한 오늘날에 도무지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혐오와 배제의 통로가 되는 동성애 논쟁과 전쟁 및 난민 문제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뭉뚱그려 말하지 않고 분별력 있는 어조로 특정한 입장과 태도를 제시한다. 단,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연역적 사고나 편협한 경험에 의해 도달된 결론이 아니라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온 방대하고 절실한 연구의 끝에 맺혀진 열매들을 정성껏 바구니에 담아 전달하는 식이라, 설득이 강요된다는 느낌보다는 친절하게 안내받는다는 인상을 받으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했던 학자들의 땀방울들을 모아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있고 무결한 내용들을 체에 걸러 고운 가루를 내어 딸에게 먹여주고자 했던 아비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특히, 가장 까다롭고 난해한 전쟁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평화와 이상을 꿈꾸고 이루어 가는 궁극적 소망을 놓치지는 않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현실의 냉혹함과 부조리의 거대함에 짓눌려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은 되지 말자는 결의는 딸이나 독자들뿐만 아니라 저자 스스로에게도 계속해서 되뇌이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나는 저자가 균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균형감은 고삐 풀린 열정으로 하나님에 앞서, 혹은 하나님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들이 이제껏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심겨놓은 기독교적 불편함과 불쾌감을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완벽하게 떼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급하게”, “함부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며 모범을 보이는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근본적인 진리의 불변함을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어 “옛 자아가 철저히 죽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 “새 자아로의 ‘변용’의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함도 일깨워주었다.
사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는 분쟁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많은 피흘림에는 종교 갈등과 성서의 오남용이 맞물려 있었다. 이는 곧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악이며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요인이라는 인식을 팽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보다 다른 영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죽고 썩혀져 끝없이 복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고 들었다.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극단주의와 탐욕으로 인한 신앙의 왜곡, 그리고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순종하는 무지함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곧 책 전반에 걸친 저자의 접근이다. 안타깝게도 굽은 길로 접어들어 오염되어 흐르는 복음은 생명력을 잃고 오늘날의 교회와 다음 세대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딸이, 그리고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살려낸 딸이 가짜 복음에서 시선을 거두고 복음의 진수를 누리며 자기 자신과 그와 연결된 모든 이들이 복음 안에서 해방되고 복음 안에서 재창조되고 복음 안에서 살아나고 살려내는 것을 경험하기를 기대하고 촉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문장을 써내려간 듯 보인다.
워낙 방대한 양의 글을 읽고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한 까닭에 딸의 단순한 질문에도 많은 신학자와 신학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고차원적인 답변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이 파도파도 끝없고 결코 정복될 수 없는 무한대로 풍부한 영적 자원이기에 다양한 해석학적 위치와 사유의 범위가 연결되고 맞물리며 발견되는 은혜와 진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그것을 농축하여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내가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신앙 선배로서 충고의 말을 건넨다 해도 우리의 불완전함과 무의식적 치우침은 자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신앙의 반발심과 걸림돌을 만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겸허하게 배우는 입장에서 먼저 깨우쳐나간 과정을 공유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각기 걸어가는 고유한 길에서 빚어가는 독특한 신앙의 신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입지에서 출발하여 깨우침의 과정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나 사람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사리 현실의 교회와 신앙의 실망스런 면모에 낙오하고 복음 자체를 폄하하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필립 얀시와 그레고리 보이드처럼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인 회의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해 따뜻한 길잡이를 자처하는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맹목적인 신자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의 대가를 치르는 참된 제자의 길을 소중한 딸이 걸어 나가길 권고하는 저자의 진심이 문자를 넘어 가슴 깊이 전달되었다. 십자가가 반드시 가로와 세로의 접점을 가로지르며 존재하듯,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우리네 인생도 반드시 두 가지 길을 성실하게 걸어 나가야 할 터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각각 온전하게 한 인격에 담겨있듯이 우리도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을 품고 살아가야 할 운명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치우침없이 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흘리신 보혈 한 방울 한 방울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우리 목숨보다도 귀한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머리로 이해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새긴 그 신앙은 역사와 문화의 옷을 덧입으면 덧입을수록 더욱 강력한 힘과 빛으로 세대의 세대를 이어 뻗어나갈 것이다. 그 희망으로 나의 다섯 살 난 딸의 사춘기와 청년의 때와 장성하고 노쇠한 시절을 거쳐 영원에 이르는 모든 순간을 기대해본다.
02.2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