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그리고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당신은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실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자신을 아는 길이다. 사람이 자신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라고 말했다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제압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다른 사람과 나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바로 하기 위해서 나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바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질문했듯이, 우리는 자주, 아니 날마다 나 자신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실존적인 질문이라고 한다. 자기의 실존 인식을 위한 고뇌가 섞인 질문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에 도전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생각된다. 자신에 대한 실제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왜 나는 그 일을 하는가?” “내가 하는 일은 과연 가치가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우리는 이렇게 숱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엘리야도 아니다. 나는 그 선지자도 아니다.”라고 한결같이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요한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몹시 고민하며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의 우리도 솔직히 세례 요한의 이상한 대답에 고민하게 된다. 왜? ‘소리’는 인격체도 아니고 영구성도 없는 일시적인 무기체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알 수 없는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을 착각하고 살 때가 많다. 어느 때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지나치게 위축되어 자신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잘난 척해서도 안 되고 너무 못난 척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실제적인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의 남편이다.” “나는 ○○○의 아내이다.” “나는 ○○○의 아버지다.” “나는 ○○○의 어머니다.” “나는 ○○○의 아들이고, 딸이다.” “나는 ○○교회의 교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등의 솔직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진솔하게 자신의 실재를 고백하는바 자신의 진실한 모습 가운데서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나답게 살았으며 또한 나답게 살고 있는가? 자신의 인간학적인 신분과 사회학적인 자리, 그리고 신앙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는 생각과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자신의 말과 행실 속에 ‘나답지 못한 말과 행위는 없었는가?’를 솔직하게 살펴보면서 좀 더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사람의 참 가치가 있다.
세례 요한은 한낱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소리’로써 민중을 깨우쳐 회개시켰다. 그는 ‘소리’로써 헤롯의 불의를 책망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세례 요한처럼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10.07.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