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기자는 한국 개신교와 장로교 선교의 초석을 다진 최초의 선교사로 잘 알려져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 파송 교회인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Lafayette Avenue Presbyterian Church, LAPC)를 방문하기 위해 뉴욕 브루클린으로 향했다. 브루클린 주택가에 위치한 교회의 내부에 들어서자 큰 규모는 아니지만 웅장하면서도 아담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 창문들, 교회의 모든 벽에 전체적으로 이어져 그려진 교인들이 등장하는 벽화(“Mighty Cloud of Witnesses”, 1978)와 교회당 정면에 위치한 큰 오르간(1910년 오스틴 오르간 회사 제작)이 인상적이었다.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는 1857년 브루클린 칼튼 애브뉴에 위치한 파크장로교회(Park Presbyterian Church)로 최초 조직됐다. 이 위치는 현재 부르클린의 포트 그린 (Fort Greene)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교회는 초대담임목사로 당시 노예폐지 운동 지지자였던 데오도르 카일러 목사를 청빙했다. 당시 마켓가에 네덜란드개혁교회 담임 목사였던 카일러 목사는 라파옛애브뉴와 사우스옥스퍼드 스트리트 모퉁이에 교회 건축을 조건으로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을 수락했다. 1860년 4월24일에 카일러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했고, 교회 건물은 1862년 3월에 완공되어 봉헌됐다. 건축 완공 후 교회 명이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로 개명됐다. 교회 설립 초기 1860년에 불과 140명이었던 교세는 카일러 목사의 탁월한 설교와 리더쉽으로 인해 30년 후 1890년에 이르러 2300명 이상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카일러 목사의 목회와 설교는 매우 복음적이었으며 선교 지향적이었고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를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교회의 주일학교가 시작됐으며 청년회, 카일러 미션밴드, 여선교회와 해외선교회, 브루클린 지역의 다수 채플을 조직하며 교회선교의 영역을 다양한 방면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의 전폭적 지원을 통해 한국 선교 시작
카일러 목사의 30년 목회기간 동안 이룬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바로 1884년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장로였던 다니엘 맥윌리암스(Daniel W. McWilliams)가 주도하여 조직한 한국 선교였다. 이 사건은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공식연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 교회 역사 가운데 중요한 획을 긋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885년 4월 5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는 아내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박사(Lillias Stirling Horton Underwood),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마침내 한국 제물포에 도착하게 됐으며, 그 날 카일러 목사는 교회창립 및 담임목사 취임 25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원두우라는 한국 이름을 받고, 의료선교사인 아내와 함께 1885년 부활절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의 선교사역은 초대 카일러 목사와 3대 담임 목사인 맥카피 목사를 비롯해서 언더우드의 형이자 든든한 지원자였던 존 T. 언더우드 장로와 맥윌리암스 장로, 엘링우드 장로 등 모두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인 이들의 전폭적이고 신실한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나 이사로서의 직무 또한 감당했다. 엘링우드 장로는 총회 연설 가운데 “조선과 조약을 맺게 된 지금이 바로 조선으로 선교를 나가야 할 적기이다. 왜 나에게 조선 선교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통해서 총대들을 움직이게 됐고, 한국 선교의 지원은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됐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러한 뜨거운 지원과 기도 가운데 정동교회(현재 서울새문안교회)와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시초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으며 성경과 많은 종교 문헌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아내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박사는 한국 최초 여성 의료진으로서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활동을 했으며 1895년 콜레라 전염병이 돌던 당시 콜레라 병원으로 변경된 더쉘터라는 무료 의료 기관을 조선에 설립하는 등 의료 구제 사역에 힘썼다. 건강악화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와 뉴저지 애틀란틱 병원에서 사망했으나 그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치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 가의 4대손들은 130년 동안 한국 교회에서 활동을 계속해왔다. 오늘날 한국 인구의 1/3이 장로교 교인들임을 볼 때 언더우드 부부 선교사와 그들을 재정과 기도로 적극 지원한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의 선교사역은 한국 개신교와 장로교 뿐 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발전과 역사 가운데 개혁주의 복음을 전했으며 교회, 학교, 병원을 설립하는 등 국가적 교육, 계몽, 구제사역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 고된 헌신을 통해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이 성장했으며 더 나아가 한국 교회를 통해 수많은 세계선교로 이어졌다는 점을 보게 될 때 온 세계와 시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된다.
라파옛애브뉴장로교회는 초대 담임 목사였던 카일러 목사 이후 2대 담임 그레그, 3대 담임 맥카피로 이어지는 동안 목회와 해외선교에 중점했다면 1913년 찰스 앨벗슨이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교회의 방향을 사회복음화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게 됐으며 그 기간 동안 교세가 지금까지 많이 축소 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전쟁 당시부터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의 상징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교회로서 오늘날에도 흑인인권운동과 사회복지, 지역전도 및 빈민 구제를 중점적으로 감당하고 있으며 팬데믹 기간 동안 옷과 음식 기부 등을 통해 지역사회를 섬겨왔다고 한다. 현재 교회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서 교회건물 내부, 천장, 하수도 등의 긴급 수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금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사회 참여와 복음화에 집중하면서 선교적 역할이 많이 줄어든 점과 자유주의 물결 가운데 동성애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세계선교와 한국의 복음화, 장로교의 시초를 세우기 위한 아낌없는 헌신과 기도, 열정으로 섬긴 아름다운 이들의 발자취와 흔적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작은 곳에서 소수의 무리의 기도와 헌신으로 시작된 선교의 씨앗이 이와같이 놀라운 큰 결실로 열매 맺었음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열방을 향한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으며 기대해 본다.
<김재상 기자>
10.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