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상항중앙장로교회)
몇 해 전 러시아 항공우주국에서 경보를 발령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집채만 한 운석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보였습니다. 해당 지역은 즉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주민들은 대피를 가고 아예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청년은 도리어 운석이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운석은 신비한 우주의 조각이고 그것이 자기 집에 떨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러 자기 집을 방문 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집이 우주와 지구를 이어주는 신비한 통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터뷰가 방송이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운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청년처럼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소동은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멋진 해석이 상황을 반전한 것이지요. 이처럼 제대로 된 해석은 인생도 바꿀 수 있다.
이름도 재미있는 하박국은 주전 6세기 초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신흥국가 바벨론이 느부갓네살이라는 호전적인 지도자에 의해 영토를 넓히던 시절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 앗수르도 바벨론에 점령을 당했고 이집트도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던 남왕국 유다는 호시탐탐 위협을 당하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불안한 정세라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데, 나라 안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패가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더욱 포악해지고 온갖 죄가 난무해 정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박국서는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 드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패역한 죄악을 그저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할 것이다.’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당해 망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황한 하박국은 다시 질문합니다. ‘그래도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좀 더 의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도 없는 불의한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명쾌하게 답하신다. ‘바벨론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의인은 그가 어떤 민족이든지 살 것이다.’ 본문은 이 대답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듣자 하박국은 두려워졌습니다.
[ 합3:16 ]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습니다. 뼈가 시리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환경은 황무지처럼 변해버릴 것입니다.
[ 합3:17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스라엘 사람의 주된 식물인 무화과는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없다면 신선한 음료수를 구할 길도, 겨울을 날 건포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도 소출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밭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으며 기근으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양도 소도 없으니 고기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박국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 합3:18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뼈가 흔들릴 정도로 두렵습니다. 그런데 기쁘다니.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쁘다고 했습니다. 불같은 고난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흉포한 바벨론 군대는 홍수처럼 유다를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기운을 차릴 열매 하나도 변변히 얻을 수 없는 참담한 환경이 닥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정치적 무능 때문도, 갑자기 커져버린 바벨론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까?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벌하는 것은 더 좋은 인생이 되도록 교훈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심판의 두려움 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컸습니다. 심판과 고난을 다시 해석하니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도 감사로 해석해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올 해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교회와 믿음 생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자연재해는 끊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가슴이 서늘한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세월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를 두렵게 했던 그 사건에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내가 실패했을 때, 홀로 남겨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을 때, 내가 잃어버렸을 때, 내가 힘들어 탄식을 쏟아낼 때...하나님은? --- 내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왜 도와주시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아나요? -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이유도 해결의 방법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나만 그런 일을 당했을까요? 아닙니다. 심지어 주님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외침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 마27:46 ]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을까요? 이것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답을 하셨나요? 하박국의 질문에 그렇게 즉시, 분명히 답하시던 하나님이 예수님의 외침에는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질문에도 침묵하곤 하십니다. 사실은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의 고난이 이루어야 할 구원을 완성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고난. 그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고 경험하는 고난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하고나면 인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Paul Brand는 세계적인 외과 의사이자 나병 전문가 입니다. 어린 시절 인도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되어 인도에서 20년 나병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미국 나병 연구소로 옮겨 30년을 나병을 연구하고 치료합니다. 나병, 한센씨병은 신경계에 침입한 박테리아로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국 신체의 부분이 절단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어느 날 고단한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발에 감각이 없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수많은 나병환자를 돌보다 결국 나병에 걸린 것인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어떤 부분이 감각을 잃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바늘로 다시 발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으로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씁니다. 고통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지요.
인생의 성숙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하게 엄습한 아픔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아픔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할 인생의 비밀들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많은 것을 우리는 아픔을 통해 알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게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내 괴로움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 성숙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읽은 시 하나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입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지푸라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일어난 단 하나의 어떤 사건도 의미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해서 뭘 얻느냐고요?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얻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도, 돈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잃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얻어도, 곁에 사람이 가득해도 불행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 잠4: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지킵니까?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 빌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이번 감사절에는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절망을 감사로 해석해 내면 인생이 달라진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hyouk@msn.com
11.1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