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 (72)

교회와 국가
이윤석 목사

국가의 법에 대한 양심의 적용

그런데 본문에 “양심”이란 말을 통해 의도한 바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국가와 그 입법조항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진술에 제한 조건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국가가 나와 하나님 사이에 들어와 간섭을 하게 되면 복종할 것인가? 

예를 들어 사도행전 4장 18-2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낫게 한 일로 인해 체포되어 당국자들 앞에 끌려가게 된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더 이상 복음을 설교하지 말라는 국가 관리의 말에 복종했는가? 

5장에서 설교를 금한 후에도 설교하니 28절에 당국자들이 사도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여기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반응한다. 그러면 이 경우에 로마서 13장 1절의 말씀에 어긋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단서가 붙는데,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 뜻을 버리거나 저버리려고 애를 쓰든지,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여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그런 이들에게 마땅히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이다. 

사도들 시대로부터 몇몇 황제들은 자기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가이사가 주시오” 하고 인사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나갔고 정부는 모든 사람들로 복종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니요! 우리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는 어느 사람에게도 예배할 수 없소!”라고 반응하였고 이것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형과 화형을 당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권세들과 정부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으니 오히려 그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되,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못하게 한다면, 이에 대해 결코 복종할 수 없다. 우리는 권세와 정부에 대한 복종에 있어 신앙 양심의 소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항상 양심의 한계 내에서 지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서 “내 생각이 옳다 하는 바를 행하려 한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무정부주의이다. 사람이 자기 양심에 복종한다고 하면서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계속 그런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양심의 자유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라, 방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서 있는 사회와 무법천지 사회의 차이를 알게 된다. 항상 자기 양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옳고 바른 말이지만, 국가가 입법조항으로 만든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점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주장이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모두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롬14:7)”고 말씀한다. 우리 위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께서 국가를 제정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지음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어떤 점들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가 그 나라 백성들 대다수의 지혜를 모아 법을 제정하고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시키거나 예배의 자유의 필요성을 배격하면서 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억지를 부리며 논쟁하거나 싸우지 않아야 한다. 또한 논란이 되는 큰 문제에 억지를 부리며 과격하게 나아가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것만 할 뿐이다”라고 말하거나 동료 시민의 보편적인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 견해를 내세우는 일은 양심의 자유의 전체 개념을 남용하는 것이 된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은 정부나 법이나 질서를 믿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실례로 유럽 대륙의 재 침례파 중에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을 상당히 의문스러운 것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루터와 칼빈은 그들에 대해 매섭게 대항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전체 개념을 극단까지 몰고 가서 양심의 자유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3)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국가에 대한 원리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원리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반드시 국가와 그 위에 있는 권세에게 자원함과 기쁨으로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누구든지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위임한 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국가와 그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사도행전 16장 19-40절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 시민권자로서 정부와 관리들에 대해 얼마나 당당했는가! 자기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하고,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했다. 그 행동을 취함으로 빌립보 행정관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이 법을 이행하도록 세움 받은 자들임을 상기시켜 주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리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에 휫필드(G. Whitefield)와 웨슬리(John Wesley)는 노방설교와 노방전도를 많이 했는데, 당시에 지방 행정관과 지방 교구목사들이 그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모임을 흩어버리려고 선동하고 어려움을 주었다. 그래서 휫필드와 웨슬리는 항상 법을 발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헌팅톤(Huntington) 백작부인에게 알리어 그녀는 그 전도활동을 법적으로 방어해 주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정부와 국가와 법과 질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심각한 불법과 불의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법을 발동할 권리를 가지고 그 법의 이행과 실행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나 그 어떤 형태의 국가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극단에 빠지곤 할 때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세자들 편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나라에 대해 최고로 충성하는 자들이지만, 때로 법이 허락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문제를 만든다면 그런 관점에 대해 싸우고 죽음을 각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의 국가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 19, 20세기에 들어와 그렇듯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랑할 필요는 없다. 

넷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항상 많은 것을 기대한다. 국가에 대해 결코 흥분하지 말아야 하며, 정치에 대해서도 흥분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선거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고 투표할 뿐만 아니라,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younsuklee@hotmail.com

 

02.2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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