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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대신대원 Th.D
다원주의: 모든 윤리적 판단을 개인기호 따라 결정...객관적 기준 부재
개종적 유형은 문화 타락 인식하면서도 문화 갱신 가능성에도 낙관적
몇 년 전에 막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여학생 세 명이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돈을 갖고 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런 성 정체성 혼돈을 전문 용어로 fluid sexuality 라고 한다는데, 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부를 때에, he도 아니고 she도 아닌 they로 부르라는 지침을 주었다고 한다. 한 사람 속에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참으로 우리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줄 왕이 없었다는 것이다. 곧 선악의 기준점(point of reference)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처럼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고, 그러한 각 개인의 선택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해줄 표준 가치가 없는 다원주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오늘 날 표준 가치 체계가 무너진 상황은 바벨탑이 무너진 것으로 비유된다. 바벨탑이 무너짐으로 한 가지 말을 쓰던 세상이 없어지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Alasdair MacIntyre의 책 “After Virtue”는 catastrophe 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St. Benedict 라는 단어로 끝맺는다. 곧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된 상황을 재앙으로 정의하고, 아직 기독교의 순수한 언어를 보존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피신하자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이다.
그에 반해서 Jeffrey Stout는 그의 책 “Ethics after Babel”에서, MacIntrye의 견해를 비판하고, 다원주의 사회를 낙관적으로 본다. 곧 인간에게는 다양한 언어를 통역할 능력이 있고,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개념적 자원(conceptual resources)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언어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각자 자기 자리(niche)가 있다는 것이다.
MacIntyre는 다원주의 시대를 감정주의(emotivism)의 시대로 정의한다. 곧 토론 (arguments)은 없고, 자기 주장(assertions)과 반대 주장(counter-asstertions)만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윤리적 판단은 개인의 선호와 느낌에 따라 내려지며, 객관적 기준(impersonal criteria)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토론할 수 있는 공동의 기반(common ground)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인 담론은 자신이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impose) 하려는 시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MacIntyre는 다원주의란 도덕적 판단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현재의 재난적 상황을 감추고, 도덕적 의견 충돌을 품위 있게 표현한 것이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Stout는 MacIntyre의 견해가 과장이라고 비판한다. 모든 종교에 황금율이 있는 것처럼, 오늘 날의 다양한 도덕적인 입장에도 대화를 가능케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MacIntyre가 일관된 도덕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고 보는 중세 기독교에도 도덕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반박한다.
Stout는 다양한 도덕적 언어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도덕적 만국 공용어(moral Esperanto)라고 본다. 곧 바벨탑은 도덕적으로 하나의 언어를 갖는 것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현실을 먼저 인정하고, 다른 도덕적 언어를 해석하며, 다른 말을 쓰는 외국인과 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MacIntyre는 중세 시대에는 인류가 다양한 문화를 초월하는 도덕적인 기준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MacIntyre는 그것을 유럽 중세 시대에 통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에 근거한 틀(Aristotelian teleological framework of the European Middle Ages)로 정의한다. 근대에 이르러 그러한 통합 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은 이제 감정적 인간의 선택에 근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Stout는 MacIntyre가 말하는 다양한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윤리 체계는 인식론적 불가(epistemological impossibility)이라고 주장한다. 곧 인간은 자신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절대자의 시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MacIntyre는 중세의 기독교 문명과 같은 보편적인 체계를 건설할 희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polis)나 중세의 수도원처럼 아직 한 가지 말을 쓰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한다. Stout는 그러한 결론을 종파주의적(sectarian)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 다원주의 문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세상과 담을 쌓는 종파주의는 분명 칼빈의 개혁주의와 다르다. 트로엘취(Ernst Troeltsch)는 그의 유명한 모형/유형론(typology)에서 교회 유형(church-type)과 종파 유형(sect-type)을 구별하였다. 교회 유형은 세상의 모든 삶을 다루려는 보편적인(universal) 태도를 가리키고, 종파 유형은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한 개인주의적인(individualistic) 태도를 보인다.
니이버(H. R. Nieburh)는 트로엘취의 모형론을 발전시켜서 1951년에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 유형론으로 발전시켰다. 첫 번째는 Christ of the Culture, 곧 세상과 될 수 있는 대로 구별을 두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현대의 세속화 신학의 태도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듯이 교회는 세상과 호흡을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Stout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정반대로 Christ against the Culture,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sect, 분파들이 있다.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공동체에서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산다. 그 울타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세상 풍조가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물샐틈없는 경계를 한다. MacIntyre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려고 하였던 중세 천주교와 같은 Christ above the Culture의 태도가 있다. 혹은 루터의 두 왕국 교리에 따라서, 교인으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분리시켰던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의 태도도 있다. 그러면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Christ transforming the Culture,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문화와 사회를 개종(convert) 시켜야 한다. 이러한 개종적(conversionist) 견해는 어거스틴과 존 칼빈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하에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주님께 순종하여 문화적 사역(cultural work)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개종론자들은 창조의 선함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죄로 타락한 것을 변혁(transform)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Christ Transforming Culture” 유형은 문화의 타락을 인식하면서도, 문화 갱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인간과 문화를 개종시키면, 자기중심(self-centeredness)으로부터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ness)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구속하시므로, 크리스천도 타락한 문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문화로 변혁시키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Stout의 말처럼 우리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지식을 가진 하나님은 아니지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 객관적인 윤리의 표준은 MacIntyre가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서만 공유하는 sect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