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교회, 풀러 Th. M
예배와 찬양의 권능부터 회복...교회가 변화되면 세상이 변화
교회가 소수를 걱정하지 말고 소수라도 각성되지 않음을 탄식
2001년부터 ‘교수신문’에서는 연말 기획으로 전국의 대학교수들의 설문을 바탕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해왔다. 올해의 사자성어란 그 해를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사자성어만 보면 해당 연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입장을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2018년을 시작하면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이 정해졌었다. 이는 사악함을 부수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전에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말이 선정되었었는데 17년 만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단어가 정해졌다. 파사현정이라는 말처럼 세상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일이 그렇듯이 지난 일 년 동안 사악함은 더 들끓고 정의는 존재감을 잃어 파정현사(破正顯邪)로 2019년 새해를 맞이하는 것 같아 우리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이제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히스기야 시대의 정황은 더욱 어려웠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는 일방적인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1. 파정현사
남유다의 13대 왕으로 25세에 등극하여 29년 동안 통치했던 히스기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남유다의 여러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던 반면에 하나님을 그의 힘으로 삼은 전무후무한 왕이었다. 아하스는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던 사람이다. 즉 남유다의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의 길로 행한 데 반하여 하나님을 떠나 배역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처럼 자녀를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미신에 깊이 골몰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가 계속 곤경에 처하게 만드셨다.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에게 재산을 다 끌어 모아서 조공을 바쳤는데 도리어 그를 공격하게 하셨다. 한데 아하스는 곤고할 때에 더욱 죄를 범하였다. 성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을 폐쇄하는가 하면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히스기야는 자기 아버지 아하스와 자기 나라의 이런 망가져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다.
또한 히스기야의 즉위 7년 전 북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당하였다. 북이스라엘의 왕조를 열었던 여로보암은 철저하게 여호와 신앙을 거부하였던 인물이다.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단과 벧엘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가 하면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제사를 관장하게 하여 하나님의 노를 샀다.
북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는데 제 명대로 산 왕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왕궁에서는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앗수르의 식민지가 되어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해 버렸다.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린 결과가 너무나 혹독하였다.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남유다의 미래를 위해 깊은 고민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북쪽에 있던 앗수르의 세력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을 목도하였다. 역사 속에서 열강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며 왕의 대로가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향해 군침을 흘렸으며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나라가 세계의 주역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앗수르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결국 정복하였다. 이제 북이스라엘보다 작은 남유다를 정복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청년 히스기야도 알고 있었다. 점차 세력이 강해지며 호전적인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어떻게 해야 민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즉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묻고 또 물었을 것이 분명하다.
2019년을 시작하는 우리들 대부분의 마음은 히스기야와 같을 수 있다. 로마서 1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가장 심각한 하나님의 형벌은 내어버려두시는 것이었다. 한국도 미국도 하나님을 떠난 삶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치 역사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처럼 내버려두신다. 더할 나위 없이 타락하고 죄악이 창궐해도 내버려두신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래서 오히려 불길하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카운트다운을 하고 계시기에 내버려두시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스스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2. 파사현정
역대기하 29장에서 4장에 걸쳐 히스기야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한 마디로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것만이 자기와 자기 민족이 살 길이라고 깨달은 듯하다(29:2). 그는 즉위한 첫해 첫째 달부터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고 성결하게 한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지은 죄와 자기 아버지가 성전에 대해 지은 죄와 역사 속에서 유다가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레위기에 규정한 대로 속죄 제사를 드린다(29:21).
특이한 것은 그가 제물을 드리기 시작할 때에 다윗의 명령을 따라 다윗의 악기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들고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의 악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29:25-27). 역대기 기자는 왜 여기서 다윗을 특히 언급했을까? 추측이지만 히스기야가 꿈꾸었던 모델은 다윗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다윗의 시대, 즉 하나님만을 높이던 그 시대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본문에서 느껴진다.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옮겨올 때 속살이 보일 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찬양하며 기뻐했던 것처럼 히스기야도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마친 히스기야는 히브리 민족 역사상 가장 큰 기적이며 명절이었던 유월절을 지킨다. 유월절은 솔로몬 이후 200여 년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였다. 그러니 다른 명절이 제대로 지켜졌을 리 만무하다. 히스기야는 팔레스틴의 최남단 브엘세바에서부터 최북단 단까지 온 히브리 민족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라”(30:7).
하지만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히스기야의 말을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유월절을 지킨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심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땅에서도 변두리 지역에 해당하는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내려와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였다(30:10,11).
우리가 개혁해야 할 것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개혁해야 할 대상은 교회이며, 교회에서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것은 예배가 아닐까? 예배가 예배다우면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회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히스기야가 성전을 열고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며 찬양하였듯이 오늘날 교회는 예배와 찬양의 권능부터 회복해야 한다.
강단에서 강력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찬양이 권능으로 가득하다면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교회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소수의 무리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언제나 소수의 역사였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그렇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게 나타났다. 교회는 소수임을 걱정할 것이 아니고 소수라도 각성되어 있지 않음을 탄식해야 할 것이다.
3. 본질회복
히스기야가 최초로 유월절을 지키는 데 두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 번째 문제는 유월절은 첫째 달에 지켜야 하는 절기였는데 성전을 청결케 하다 보니 첫째 달은 이미 지나고 둘째 달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때 이미 유월절 절기가 지나갔으니 명년으로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비록 둘째 달이었지만 유월절을 지켰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문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정결례를 거쳐야 한다는 데 있었다. 정결례란 세상의 오염을 씻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기 4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먼저 진 밖에 7일간을 머물러야 했고, 정결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어야 했다. 그리고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 정결례를 지켰다. 하지만 북쪽에서 내려온 자들 중 많은 무리가 정결례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용서하셨다(30:19,20).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받으신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무교절을 칠 일 동안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시 칠일을 지켰다. 그들의 넘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칠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넘쳤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신약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구약 시대는 모양과 형식을 중시한데 반해 신약에는 내용과 중심을 중요시했다. 여기서 구약적 관례대로라면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지키는 절기도 명년으로 미뤄야 했고 정결례를 고집하고 성결치 못한 사람을 유월절 행사에 참여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절기가 늦어졌지만 지켰고 성결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으로 유월절을 지키게 한 것은 대단히 신약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을 신약적 사건이라 했지만 실제로 구약 시대에도 더 중요한 것은 항상 본질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귀히 여기셨던 이유는 그의 ‘마음’ 씀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출32:32). 다니엘은 몸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감사하였다.
마음이 빠진 예배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다. 요엘 선지자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2:13)고 하였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2장에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쉴 곳이 없어 다시 돌아오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이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보건대 마음이 비고 깨끗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마음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야 한다(롬14:17). 술 취하듯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엡5:18).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갈5:16).
세상이 참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이 변화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고 일어나면 변화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희망이시라는 사실이다. 파사현정, 이것은 모든 사회의 꿈이지만 파정현사가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힘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파사현정의 현실에 맞서 싸워 파정현사의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