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방생주(老蚌生珠)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나이 들어 늙음을 탓하지 말라는 말은 제법 많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참 많다. 말과 실재의 차이는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건만 몸이 따르질 못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들에 눈을 치뜨게 된다.

그리스 격언에는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리라는 말이 있고 나이는 기억력을 빼앗는 대신에 통찰력이 자리 잡는다는 말도 있다. 고려장 풍습이 있던 옛적에 박정승은 노모를 지고 산에 올라갔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리자 노모는 “네가 내려가는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고 말했다. 박정승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노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몰래 국법을 어기고 노모를 모시고 산에서 내려와 노모를 봉양했다. 그 무렵 수나라 사신이 똑 같이 생긴 말 두 마리를 끌고 와 어느 쪽이 어미이고 새끼인지를 맞추라는 문제를 내놨다. 못맞추면 조공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정승에게 노모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말을 굶겼다가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 박정승이 이 문제를 풀자 수나라는 또 다른 문제를 냈는데 그건 네모난 나무토막의 위아래를 가려내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노모는 “나무란 물을 밑에서부터 빨아올린다. 그러므로 물에 뜨는 쪽이 위쪽이란다.” 박정승이 이 문제도 풀자 약이 오른 수나라는 더 어려운 문제를 냈다. 그건 재로 새끼를 한 다발 꼬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 박정승의 노모가 하는 말이 “애야, 그것도 모르느냐? 새끼 한 다발을 꼬아 불에 태우면 그게 재로 꼬아 만든 새끼가 아니냐?”고 알려 주었다. 수나라에서는 박정승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자 ‘동방은 지혜 있는 민족이다’라며 다시는 깔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나라를 구한 노모의 현명함이 왕을 감동시켜 고려장이 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물론 고려장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가짜 뉴스였다.

성경을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32)는 말씀이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려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기 직전에 있다. 그만큼 노인이 많다는 말이고 이는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중이다. 연금이 고갈된다거나 무임승차 문제가 불거지며 여기도 저기도 노인 기피 현상이 가중되고 있다. 노인 하나가 죽으면 살아 있는 박물관 하나가 없어진다는 안타까움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젊은이들이 누려야 할 미래를 갉아먹는 염치 없는 세대로 치부가 되는 까닭이다. 

노방생주(老蚌生珠)라는 말은 늙은 조개가 진주를 품는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봄에 뿌린 씨가 여름을 거치지 않고 결실하는 일은 절대 없다. 오늘의 노인도 어제는 청춘이었다. 노인이 청춘이었을 때 오늘의 젊은이는 어린아이였거나 태어나기 전이었을 수 있다. 즉 오늘은 오늘의 노인들이 일궈놓은 것이고 그것을 젊은이들이 누리는 것이기에 내일의 몫이 노인들에게 없다는 말을 맞지 않다. 

정치에만 통합이니 화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사(勞使)가 하나 되어야 회사가 발전하고 나라도 부흥되듯 세대 간의 갈등도 해소되어야 모두 다 행복한 오늘을 살 수 있다. 오늘의 노인이 누구인가? 젊은 누군가의 부모가 아닌가?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추해도 천륜(天倫)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모를 닮지 않은 자식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범죄는 모방이 매우 심하다고 한다. 누군가의 악행을 따라 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차가 꽉 막혀 있을 때 어느 차 한 대가 갓길로 쌩하고 지나가면 그 뒤를 따르는 차가 줄을 잇게 된다. 그것이 불법이어도 마찬가지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것은 악 때문이었다. 원성(怨聲)이 크고 죄악이 무거웠으나 무엇보다 인성(人性)이 더 큰 문제였다. 외부의 농민이 추수한 곡식을 가지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팔려고 들어가면 성민들이 팔려고 내놓은 곡식을 한 움큼씩 집어갔다. 그 성에서는 남의 것일지라도 손으로 한 움큼을 가져가는 것은 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움큼씩을 가져가면 농민의 곡식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수고하여 추수한 곡식을 다 빼앗긴 외부의 농민은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무엇보다 더 큰 악으로 보셨다. 말살된 인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늙었다는 이유 즉 나이를 먹었다는 것 때문에 현재로부터 소외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늘을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자의 내일은 어떠할까? 그들이 노인이 되었을 때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악순환은 절대 끊어지지 못한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 가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바로 인성의 회복일 수 있다. 노방생주(老蚌生珠)라는 말이 새삼 정겨워진다. 늙음이 필요하다는 말이기에.       

hanmackim@hanmail.net    

09.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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