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이 땅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귀중하고 값진 것은 주의 영광을 하늘에 두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한때 빛이 날 뿐 영원하지 못하다. 땅의 것들이 잠시 빛을 비추는 것 같아도 하늘에서는 아무 빛도 발휘할 수 없다. 그러기에 히브리서에 이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라 했다.
노벨상의 창설자인 알프레드 노벨은 ‘나는 무엇으로 기록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삶의 송곳이 되어 그의 인생 막판을 송두리째 뒤집었다. 1895년 11월 27일 노벨은 미리 써 놓은 유서를 생전에 전격 공개하며 자기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의미 있는 상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노벨이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된 계기는 언론의 오보로 살아서 자신의 부고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유서를 공개하기 7년 전인 1888년 노벨의 친형 루드비그 노벨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다. 당시 한 신문이 이것을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으로 혼돈해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부음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이 기사를 본 알프레드 노벨은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소유하며 폭탄과 탄약제조 공장을 포함해 90여 개가 넘은 사업체를 거느린 굴지의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노벨은 자신이 평생 독신으로 악전고투하며 살아 온 삶이 결국 사람들에게 ‘죽음의 상인’으로 밖에 기억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접하고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 후 7년 동안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죽음의 상인이 아니라 인류에 수여되는 최고의 가치 있는 상’의 창설자로 기억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다. 그가 만약 신문의 오보로 인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되는 자신의 부고를 미리 보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이 세상에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티쿤 올람이라는 히브리어가 있다. 티쿤은 바꾸다, 올람은 세상이라는 말인데 이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수상을 지낸 시몬 페레스는 이 말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은 바꾸었다. 자전거도 만들지 못하던 시절에 항공기를 만들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하며 작은 비전을 위한 방은 없다면서 더 큰 비전을 품고 이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세상이 워낙 급변하다보니 많은 신조어가 등장한다.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은 ‘공동·협력·협업·협조’의 뜻을 가진 단어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보와 데이터를 비롯해 메시지, 의견 등을 서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컬래버레이션은 한발 더 나아간다. 교제나 교류 또는 협력과 협치는 부정보다는 긍정에, 악보다는 선에 더 가깝다. 악용되기보다는 선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다. 바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요소들인 것이다.
노벨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될 것에 충격을 받고 그것이 그때까지 살아온 그 인생의 송곳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만인의 영혼을 찌르는 송곳이어야 한다. 그저 적당히 한세상을 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안일 무사주의에 들려줘야 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절대 교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어져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의 생기(生氣)는 세상처럼 소멸하지 않는다. 세상이 망하는 종말 즉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기(연혼)는 심판대에 서게 되며 단 하나의 조건(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여부)에 따라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갈릴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가 중요할 수 있다. 노벨의 삶을 변화시킨 그래서 인류발전에 공헌하는 노벨상이 제정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물음에 반응해야 할 절대 이유가 있다. 세상이 기억하는 의나 선을 넘어 영원함에 이르러야 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을 알고 이해하고 믿되 이 말씀을 먹어야 한다. 먹어서 소화된 그 진액이 이 세상에서 나의 이름이 무엇으로 기록될 것인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소원해야만 한다.
‘무엇이 중한디!’ 두말할 것이 없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이 중하기에. 그 귀한 이름 예수! 천사도 흠모할 만한 그 이름은 하늘의 영광에 있다.
hanmackim@hanmail.net
03.1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