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세월이 참으로 하 수상하다. 상식도 논리도 통하지 않을 이상한 것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이 되는 인심이 무섭기도 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공정과 정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거나 시대착오적 고집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남편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이은해와 그 공범이 공개수배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주 이상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치를 떨만큼 가혹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그런 이은해를 동조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가 너무도 황당하다. 예쁘기 때문이란다.
범죄자가 예쁘면 그 어떤 행악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며 이런 일부의 무뇌적 일탈에 동조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점을 어찌 이해하여야 될지 혼란스럽기까지 한다.
하기야 현재의 대통령을 지지하는 자들 중에는 잘 생겨서 지지한다는 것이며 그 지지에는 국정수행 능력이나 심지어 실패한 정책 등은 하등의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대통령이 잘 생겼으니 지지한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뿐이 아니다. J 전 장관과 그 가족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 논쟁이 뜨겁다. 그의 문제는 이번 대선에까지 부정적인 여파가 적지 않다고 평가되는데 그가 한창 여론의 중심에 서있을 때도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웃을 수 없는 내용들이 오르내렸었다. 그런 영향일까? 모 국회의원은 그와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는 심경을 오늘 언론에 공개도 하였다. 가히 이해부득이나 그 또한 엄연한 현실이며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오늘의 제목인 무뇌(無腦)는 ‘생각이 없다’로 해석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법이나 상식이 적용되는 행위에 있지 않고 그 용모에 있다는 논리를 펴며 그런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눈이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는 눈 두 개를 가진 자가 장애인이라는 억지가 이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사실과 다름이 없다.
지난 주 부활절을 지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 하기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 그가 지신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통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올 때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며 흘러내린 땀에 핏줄이 터져 붉은 피땀이 되었다.
그를 판 것은 늘 그를 따르며 선생이라 불렀던 제자 중 하나였고, 죽기까지 다짐하며 그를 따르겠다던 제자는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가 병자를 치료하며 이적을 행하는 자리엔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었으나 그가 죽임을 당하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신 십자가는 그를 믿는 자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까지를 아우르는 구원의 담보였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그 증거다. 누구든지에 구분이나 구별은 없다. 조건은 단 하나! 그의 이름 ‘예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자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잘난 사람으로 꽉 차있다. 못난 사람이 거의 없다. 잘난 사람은 어떤 기준일까? 이치와 상식과 논리를 적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잘난 사람들이 왜 무지할까? 자기 혹은 사람들이 만든 어떤 피조물을 자기들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것들을 믿는다. 이보다 더 이율배반적인 무지가 어디에 있을까? 만들고 그 만드는 과정을 본 자들은 안다. 자기들이 만들었으니 신앙의 대상이 못됨을 분명히 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가 그렇게 만든 것들에게 복을 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처음 행하신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다. 잔치가 한참일 때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떠다 채우라고 하셨다. 항아리에 물이 차자 그것을 그대로 떠다가 주라고 하셨다. 떠다가 주니 가장 좋은 술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고 언제 어떻게 물이 술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술의 출처에 대해 하인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예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를 옹호하고, 잘 생겼기 때문에 위선자에 실패를 반복해도 그를 지지하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죽은 것들로 자신이 만든 것을 주인으로 섬기며 믿을 뿐 아니라 복을 빌기도 하는 그 잘난(?)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며 배역할 뿐 아니라 만인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친히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자들이 아침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갖은 방법을 다 했음에도 그들이 믿는 신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죽어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잘난 자들의 무지가 무뇌를 부추긴다. 생각이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방법이 없으실 것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메이요우(沒有)라고 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마저 방법이 없는 세상과 세대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기도가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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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