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다. 선악 간 누군가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으니 나름의 복심(腹心)은 다 있다. 이런 복심에 대해 떠들썩하게 오간 뉴스는 의외로 많다. 문고리 삼인방이니 수문장이라는 소수 복심을 넘어 기레기들이니 콘크리트 지지충 운운하는 다수의 편가르기가 난무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혼자일 수 없다는 반증일 것이다.
깐부는 딱지나 구슬치기와 같은 놀이를 할 때 동맹을 맺고 놀이자산을 함께 공유하는 가장 친한 친구, 짝꿍, 동반자를 뜻하는 은어다. 깜보, 깜부, 깐보라고도 한다. 어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안도 방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를 정치인들이 한 편 혹은 내 편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의 세계에는 적아의 구분이 거의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의 헤쳐모임은 있을지언정 의리와 충정은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아닐까 싶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인들은 매우 희소하다. 그러니 이해여부를 떠난 진정한 관계형성은 애초부터 틀렸을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선지자와 선견자 등은 거의 하나님의 복심이었다. 성경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신·구약 66권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세상의 상식이나 판단의 기준으로 가감되지도 않았다.
이런 역할은 예부터 존재했다. 왕과 신하들이 나눈 모든 대화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직분 즉 사관(史官)이 그것이다. 사관은 자기의 그 어떤 것도 사실기록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사관은 동호지필(董狐之筆 또는 董狐直筆)로 역사를 기술하는데 귄세(權勢)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자여야 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바로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더는 좌시하실 수 없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만나셨다. 아브라함은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대접하였다. 주님이 떠나시면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는 것이 가하지 아니하다면서 그 땅에 의인 오십 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내려가 열 명이 있다면 어찌하시겠느냐고 간청했으나 죄악된 그 땅엔 의인이 없어 결국 멸망을 당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의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그의 조카 롯과 그 가족을 죽음의 땅에서 건져내신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심이었다. 복심은 의로움을 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복심은 세상에 대한 은혜와 긍휼도 간할 수 있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용서도 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리사욕과 불편부당함은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깐부들이 곳곳에 필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독생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복심 중의 복심이셨다. 그랬기에 그는 사명의 쓴 잔으로 인해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만큼 괴로워 하시면서도 그 쓴 잔을 피하시지 않으셨다. 곧 십자가의 죽음이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즉 성도는 이런 주님의 복심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며 주님의 복심은 철저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말세라고 한다. 말세가 되면 혼란과 배신이 만연하고 믿음과 정의는 설자리를 잃어 진정한 깐부가 더 절실해질 것이다.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가까이 부르신 뒤 물으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그를 깐부로 여기셨다는 증거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얻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먼저 택하여 세워주신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깐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먼저 깐부가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깐부가 되어야 함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까닭이다. 이 놀라운 사명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깐부로 택하셨기에 택함을 받은 자는 마땅한 깐부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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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