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은 하고 사는가?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세월이 약이 되는 것은 젊었을 때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 더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작고 큰 잘못을 돌이킬 시간도 없다. 다시 말해 나잇값을 하기가 너무 늦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후회도 되돌림도 바꿈도 젊어서 해야만 된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많은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이건만 사람은 욕심으로 인해 나잇값과도 같은 지혜마저 놓쳐버리기 일쑤다. 낫을 들고도 그것이 기역 자인 것을 모르는 것은 지식의 문제이지만 제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미련함이 문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물질문명은 이미 인간의 한계에 다다랐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다움 즉 인성(人性)은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었거나 파괴되어버렸다. 도둑은 제 발이 저린다는 속담이 있다. 저지른 잘못이 드러날까 봐 얼굴이 벌게지면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 그것을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했다. 비록 도둑일지언정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 인지상정이 남아 있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지는데 거짓말과 같은 부끄러운 행위를 할 때 마음에 죄책감이 생겨 귀가 붉어지게 되는데 이는 현대과학으로도 입증이 되었다. 따라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귀가 붉어지는 않는 것은 생리기능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문제는 이런 생리기능에 이상을 지닌 사람들 그 중에도 소위 위정자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거나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어찌 보면 인간성을 잃어버린 불쌍한 군상들이 아닐 수 없다.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리 값 혹은 직책 값을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직책이 높아 남이 문을 열어주는 차를 타고 내리면서 그에 대해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거나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는 이들이 장관으로 행세하고 자칭 지도층이라 으스댄다. 이런 위정자들이 많게 되면 난세가 되고 만다. 어쩌면 코로나19(COVID 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판데믹보다 수오지심을 느끼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득세가 더 큰 위기며 세상의 불행일지 모른다. 

이러한 때에 정말로 필요한 그래서 주님이 찾고 계신 사람은 누구일까?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절대 기준처럼 종말의 징조는 사람의 몫이 아니기에 사람은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잘잘못에 대해 ‘재가 그랬어요!’하며 일러바치듯 네 탓이라 삿대질을 하는 것은 그래서 나잇값도 자릿값도 아니다.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실 만큼 쓰디쓴 잔인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단 한 마디의 자기변명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진실은 변명이나 변호로 밝혀지는 것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남의 잘못에는 입에 거품을 뿜으며 손가락 총을 쏘아대지만 정작 자신의 불법에는 온갖 변명으로 포장을 하는 힘 있는 자들의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콧구멍이 두 개라서 숨을 쉰다는 기가 막히는 사연들이 여기저기에 넘쳐난다. 배에서 실족하여 북한수역으로 휩쓸려간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자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월북했다는 발표부터 하고 보는 정권, 아들의 휴가의혹이 석연치 않게 무혐의가 되자 의혹을 제기한 이들을 형사 고발한 법무장관은 과연 직책 값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온갖 죄로 관영해지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차피 복마전과 같다. 이전 정권은 비리투성이고 이 정권은 깨끗하니 적폐청산이 정당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정권이 잘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의인이 단 하나도 없는 세상인지라 네 탓만을 외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나잇값은 관용과 이해일 것이다. 특별히 힘 있는 자들의 배려와 양보는 그래서 미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까지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듯 힘 있는 자들의 자기 비움과 내려놓음은 가장 아름다운 나잇값일 것이다. 이런 나잇값이 많아질 때 세상은 그나마 살만해지지 않을 까 싶다. 여기에는 성도들의 나잇값이 절대적이다.            

hanmackim@hanmail.net    

10.1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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