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조희염(1885-1950)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희염(曺喜炎)은 1885년 2월 20일 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서당 에나가한문을공부하던그가20세 쯤에 캐나다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의 경신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에 졸업 했다.

캐나다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조희 염은 1918년에 캐나다 할리팍스에 있 는 장로교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 부하고 1921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해그는캐나다토론토에있는낙 스 대학에 입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문학사학위를취득한후토론토대 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사를 취 득했다.

유학생 기도회 설교자

시카고 한인교회가 창립되기 전 1922년경 시카고 남쪽 레익팍의 김일 선의 셋집에서 모이는 유학생 기도회 와 1923년경 북쪽 링컨 애비뉴의 강 영소 부부의 집에서 모이는 이민자 기도회가 있었다. 낙스 대학에 재학 하던 조희염이 남쪽 유학생 기도회에 서가끔예배를인도한것으로보인 다.당시남쪽유학생기도회에는담 임목사가 없었으므로 신학생들이 번 갈아매주일예배를인도했다는증 언이뒷받침해준다.당시유학생기 도회에는 차의석, 황창하, 현정염, 염 광섭등10여명의유학생이출석했 다고 한다.

시카고 한인교회 전도목사

조희염은 박사학위를 하고자 미국 시카고대학교 신학부에 등록했다. 재 학 중 그는 1925년과 1926년에 걸쳐 외국인학생회 회장, YMCA 외국인학 생부부장을역임하는등학생활동 에 적극적이었다.

1924년 7월 27일에 시카고 한인교 회가창립될때조희염은강영소,김 경, 박장순, 차의석, 김원용, 염광섭 등 과함께본교회의설립발기인이었다. 김창 준 목사 가 본교 회 담임 목 사로 부 임한 후 조희 염 은전 도목사로선임되었 조희염 목사 (1926년) 다.

그해 12 월29일하오7시경에50여명이모 인 가운데 성탄 경축과 송구영신을 위한 연회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날 내한 선교사였던 가필드 앤더슨 박사내외,뉴욕YMCA총무E.H.락 우드, 시카고대학 청년회 위원 B.W. 딕슨내외,시카고장로교목사브라 운 박사 내외, 한인교회가 사용하던 미국인 교회의 화잇 사모와 한인교회 반주자 핫필드 여사와 한인교회 솔리 스트 채니 여사가 참석하였고, 근자 에유학온노중택과팍대학생김마 리아가 참석했는데 그들은 특별 내빈 이었다.

1부에 만찬회가 있었다. 만찬회 첫 순서로 조희염 목사가 기도하였다. 이 후 김창준 목사의 경축사, 브라운 박 사의말씀,채니여사의성탄창가,핫 필드 여사의 풍금 연주, 김 경의 화잇 박사축사대독,화잇사모의말씀,딕 손여사의풍금에맞춘딕손의찬양, 락우드의 말씀, 핫필드 여사의 풍금 독주, 앤더슨 박사의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난후10여명의어린이와본 교회설립에공헌한미국인친구제 씨에게 선물을 주었다.

2부여흥회는그날9시반부터시 작하여 11시경에 마쳤다. 이날 준비 한한국음식은평양국수,서울장국밥, 경상도 대구 자반, 제주 용마탕, 진남포 이삿떡, 원산 명태 자반, 만경 만두국, 송도 송편, 금포 김치국 그리 고 5백년 이시조의 이밥 등이었다.

시카고 한인교회 설교 목사

김창준이 게렛 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하여 1926년 11월쯤에 시카고를 떠났는데그가떠난후조희염이전 도목사에서 강영승, 노준택, 염광섭과 함께예배인도자겸설교목사로변 신했다.

조희염의 첫 행사는 1926년 12월 크리스마스 축하식이었다. 본 축하식 에는 연극이 있었다. 유학생들과 교 회 유지인사들이 작은 연극을 준비하 여 출연하였는데 이날 들어온 의연금 이 무려 600여 달러였다.

위의 크리스마스 축하식 의연금 600여 달러를 토대로 하여 여러 인사 가 드린 헌금으로 시카고 한인교회는 예배당구매를서둘렀다.본교회이 사부가 우선 셋집이라도 빌려 교회당 으로 사용함이 좋다고 여겨 레이크팍 애비뉴 3901번지의 가옥을 세 얻고 1927년 5월 8일에 첫 예배를 드렸다. 이전의 예배는 현재의 일리노이대학 시카고 캠퍼스 부근의 세인트폴 예배 당에서 있었다.

그날오전11시에드린첫예배는 개당식으로 거행했다. 이 건물에는 예 배등집회를할수있는처소뿐만아 니라8,9개의침실도있어시카고거 주 한인들과 시카고를 오가는 한인 유학생들에게 편의를 줄 수 있었다. 김일선의 부인 김현숙이 이러한 본 교회 사무를 담당하였다.

조희염의 목회는 한승곤이 시카고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1927 년 12월 전까지다. 그의 섬김은 1년 중 얼마였다.

북미주 대한인 유학생 중부대회

조희염은 유학생으로서 북미주 대 한인유학생 총회를 중심으로 유학생 을향한선교적사명을가지고기독 교 문화사역을 통하여 복음 전도에 힘썼음을쉽게인정할수있다.그가 북미주 대한인유학생 총회의 회장재 직 시 북미유학생 중부대회가 1927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시카 고한인교회 예배당에서 있었다.

본 대회는 특별히 임시정부 공고책, 구미위원부 문제, 당쟁 조화책, 표면 운동문제,민족사회양주의조화책 그리고전투문제등한인사회의긴 급한 정치 문제를 가지고 토의하는 것을 순서의 중심으로 하였고, 분과 위원까지 두어 당면 문제뿐만 아니라 근본 문제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고 한 후 토의하고 결의하기는 북미유학 생회가있었던후처음있는일이었 다.

에번스턴의 스웨덴신학교 강당에 서모인제3일제삼토론회에서외국 선교회 문제도 다루었다. 우선 분과 위원회가 보고하고 이어서 선교회 필 요여부,선교회의흠결그리고선교 회 개선책을 오천석의 인도로 토의했 다. 조희염이 당시 북미주 대한인유 학생총회의총회장일뿐아니라중 부대회 ‘선교회 문제과’의 4명 위원 중한명이었으며,특별히본교회설 교목사였으므로 복음 전도를 위하여 크게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미주 대한인유학생 중부 총회가 주최하고 시카고한인교회의 대한인부인회가 후원하여 그해 9월 8 일목요일하오8시부터시카고시내 세인트 제임스 미국 감리교 예배당 부속 주일학교의 연극실에서 음악회 와 연극회가 있었다. 입장권은 평균 1 달러 50센트였다. 이 입장권 수입으 로북미주대한인유학생총회가발 행하는 ‘우라키’의 재정을 확보하겠다 는 취지였다.

출연한 사람은 여학생으로는 성악 으로 유명한 임베세와 손진실, 피아 니스트로 유명한 윤성덕과 김진주 등 이 있었고, 남학생으로는 성악으로 유 명한 윤기성과 박리근 그리고 피아니 스트로 유명한 현재명도 있었다. 그 외에 손캐트린과 오천석 등이 협력했다.전 직총회 장이었 던조희 염의뒷 바라지 를쉽게 추측할 수있 다.

‘우라 키’는 1925년

우라키 제1집

9월 26일에 창간된북미유학생 총회의 기관지로 서울서 발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안동 원, 인쇄인은 정경덕, 인쇄소는 조선 기독교 창문사, 총판은 한성도서와 평 양광명서관그리고시카고구미총 대리부였다. ‘우라키’ 제1집은 A5판 170여 쪽으로 미국에서 50센트였고, 신한민보사를 통하여서도 구매할 수 있었다.

조희염의 신학사상은 ‘우라키’ 제3 집에 기고한 ‘인류사회가 어떻게 발전되었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본 기 고문은 71쪽에서 79쪽까지 8쪽에 해 당했다. 

 

졸업과 귀국

한국의 캐나다 선교부로부터 ‘귀국 해서 귀하의 힘을 한국 신학교육에 보태주시기 바란다’는 초청장을 받고 박사학위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조희 염은 귀국한다. 1927년 11월 25일에 그는, ‘신한민보’를 그대로 빌리면, “ 다년간 북미 학창에서 고난을 무릅쓰 고형설의공을쌓았던바금번에는 큰포부를가지고환향의길을떠났 다.”

귀국한 조희염은 함흥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봉직하면서 신 학교 신학부장의 책임을 맡고, 함흥 YMCA 총무직도 겸했다. 그는 계몽운 동에 집중하는 한편 복음전도를 위해 북한 전역은 물론 만주 북간도까지 순행했다.

1929년 2월에 미국 중가주 다뉴바 한인교회와 북가주 샌프란시스코 한 인교회가 함흥의 이재민 동포에게 의 류다섯궤를보냈을때함흥구제회 회장에게로 부쳤는데 당시 구제회 회 장이 조희염이었다.

그런데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의 홍한식 목사가 하와이의 와이파후 교 회로 파송되어 본 교회는 적임자가 없어공석으로남았을때조희염이3 개월 후에 본 교회로 부임한다는 1929년 10월 3일 자의 ‘신한민보’ 기 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 고, 드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변홍규가 부임하였다.

조희염은 1930년에 독일 베를린에 서 개최한 세계면려청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사정을 소개 하고 한국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간청했다.이일로귀국즉시옥 고를치른후그는유럽과러시아여 행기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바깥 세상을 알렸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 부로 강제 폐교되자 조희염은 이듬해 3월 27일에 ‘장로회 신학교 설립기성 회 실행위원회’ 이사가 되었고, 1940 년 4월에 ‘조선인에 의한 장로회신학 교’설립에 뜻을 모아 서울 승동교회 에서 개교한 조선신학교의 교수가 되 었다.

해방되면서 38선이 그어져 원산에 묶인 조희염은 원산 남부교회를 개척 하고 목회하였다. 평양의 조만식이 있 다면 원산에는 조희염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원산에서 존경받는 존재였다. 6.25동란이 일어난 지 4개 월쯤 되던 1950년 10월 9일 새벽에 혹독한고문을받은후조희염은향 년 65세로 순교했다.

damien.sohn@gmail.com

 

06.2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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