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조득린 목사(1864-194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1920년 오마하장로회신학교 입학 3년후 졸업, 해외선교사로 한국행

1926년 멘티카 한인교회서 1년간 시무, 유학생 신분 때문에 숨기도

조득린은 평남 영원에서 태어났으나 서울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 국민회 할빈 지방회 보고에 따르면 그는 1864년경에 태어났고, 72명의 석두하자 지방회원 중 한 사람이었다. 

조득린은 1915년 7월 23일에 만추리아 선편으로 정덕근과 송승균과 함께 미국의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곧바로 하변(리버사이드)으로 이동한다. 

그는 그해 9월 16일자 신한민보에 “한국 현시 정황”이라는 글을 통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인 동포들에게 한국 상황을 전한다. 본 기고문은 총독부의 사정, 인민의 정도 그리고 종교계의 형편 등 3가지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조선 총독부는 한국 백성의 한국 혼을 박멸하고 일본 정신을 고취하는데 이는 악독한 압제보다 더욱 매서운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각 군과 각 면에 조직한 민풍 개선 하에 청결과 도로 수축, 야순 경찰 선출 등 재정 보조 없이 한국인 스스로 하도록 하였고, 여자 15세 이상과 남자 18세 이상으로 결혼 연령을 정하였으며, 사립학교 자격을 기본금 1천원 이상, 생도 50명 이상, 교수실 10간 이상, 운동장 3백평 이상, 교사 4인 이상으로 하고, 학과 정도는 보통지식에 국한하여 군 주사나 헌병 보조원의 자격에 제한하였고, 총독부 지정 교과서를 사용토록 하였다.

조득린이 말하는 인민의 정도는 한국인은 독립사상이 있고 노예근성이 없다.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산업이란 농사뿐인데 이마저 어려워 서북간도로 이주하는 자가 매년 3, 4천 명에 이르렀다. 상업의 경우 평양 거리에서 상점을 하고 중상을 하는 자의 10분의 8이 관청에 의해 영업 금지령을 받았으니 전국적 상업 현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계의 형편에 대한 조득린의 주장에 따르면 유교는 아주 없어진 모양인데 서울에 공자교가 따로 조직되었고, 단군교가 설립되었고, 동학은 일진회로 변했다가 시천교 혹은 천도교로 불렸다. 기독교인은 30여만 명에 이르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평양에 대학을 건축 중이었으며, 일본인이 제일 성가시게 생각하는 종교는 기독교였다. 

 

하변 교회 목사

 

도미한 그 다음 해인 1916년에 조득린은 자비량으로 하변 교회를 섬긴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순회전도사였던 방화중 전도사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해 그는 국민회 하변 지회 학무원을 맡았는데 그 임원의 대부분이 하변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회장에는 이학현, 부회장에 정지영, 총무에 안영일, 서기에 최윤호, 재무에 박성민(?), 법무원에 김순학, 구제원에 박충섭, 대의원에 문영운이었다. 

그런데 그해 3월 5일에 그의 학무원직을 김희준이 대신했음으로 이전에 하변을 떠났으니 그의 목회는 3달이나 되었을까? 그런데 그가 곧바로 하변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하변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나성 성경학교

 

1917년 1월에 조득린은 유타주 깔랜드로 이주하여 서대현과 함께 40에이커의 땅에 참외 농사를 하였다. 그해 가을에 그는 가주 삭도(새크라멘토)로 이주한다. 1918년에 그는 본 지방의 국민회 학무원을 맡아 그해 9월에 국치 제8년의 기념식을 거행할 때 기도와 연설을 맡았다. 그런데 그해 나성(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예수 탄일 경축이 성황이었을 때 그가 기도순서를 맡은 것으로 보아 나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7월 한인 유학생 조사에 따르면 그는 나성에 있던 성경학원 성경과에서 공부했다. 당시 김재성도 그 학교 학생이었는데 오늘날의 바이욜라 대학이다.

 

오마하 장로회 신학교

 

1919년 8월 14일에 조득린이 네바다 주의 오버톤의 국민회 파출소 위원으로 활동하더니 이듬 해 오마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신학교 재학 중에도 신한민보에 기고하는가 하면 인근 미국 교회에서 한국을 소개하였다. 1921년 2월 24일에 신한민보에 소개된 아래의 “하도원의 열심 전도”는 그의 기고문이다: 

“네브라스카 오마하에 류하는 조득린 씨의 본월 5일 통신을 의지한즉 수년간 미주에 유하다가 얼마 전에 환국한 하도원 씨는 지난 예수 성탄 시기에 평양 서면 남형제산면 천동교회에 부흥회 전도일을 맡아 한 주일간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이적으로 어려운 병을 고친 일까지 있었고 본시 평균 500명씩 출석하던 교당인데 하도원 전도사의 부흥회를 지난 후부터 천여 명이 매 주일 예배 시간에 출석한다 하였더라.”

1903년에 내한하여 1919년까지 평양과 재령에서 사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해리 C. 파이팅 선교사가 1921년 12월에 미국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한인에 대한 너무나 참혹한 학살을 저지른 일본을 규탄하였다. 이에 조득린은 고마움을 표하는 기사를 신한민보에 게재하였다. 

그에 따르면, 파이팅 선교사가 한 주일 동안 여러 교회와 학교에서 강연하였다. 지난주일 제3장로교회 아침 예배와 제2장로교회 저녁 예배에서 본 선교사는 한국 역사가 4,254년이고,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면서 한국 지형은 엄지손가락과 같은 반도이고, 한국이 잠수함을 세계에서 제일 처음 발명하였고, 종교와 도덕과 문학에 있어 일본보다 앞섬을 말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 황제는 헤롯왕으로 한국교회는 사도 시대의 교회로 대비하면서 일본이 아편 주색 등 추악한 물건을 한국에 수송하고 한국교회와 민족을 멸절하고자 하였으나 한국교회와 한인의 독립사상은 더욱 공고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여러분, 미국인과 세계는 권세를 탐하지만, 미약한 한국민을 택하사 교회를 그곳에 세웠으니 여러분이 한국을 돕지 않으면 한미조약만 어기는 불신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글 끝에 그는 ‘이같이 성심으로 우리 일을 선전하는 파이팅 박사는 자기의 명예나 혹 금전을 위하는 것은 추호도 없고 다만 신성한 하나님의 뜻으로 나오는 그 보성을 우리는 치하합니다’고 적었다.

 

미국 북장로교 조선 선교사

 

오마하 장로교신학교 졸업생으로 해외선교사로 섬긴 명단에는 조득린 Cho, Tuck Nin과 선교지역인 조선 Korea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한인 목사로서 조선 선교사가 되었고, 미국 북감리교가 파송한 의료 선교사였던 김에스더 박사에 이어 한국인으로 한국에 파송된 두 번째 선교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파송한 해외선교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귀국길에 조득린이 상항에 머문다. 그는 1923년 5월 6일 상항 한인 예배당에서 ‘인류의 사교’라는 주제로 설교할 예정이었다. 이에 신한민보는 한인들의 출석을 독려하고 그의 고상한 언론을 들어야겠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달 11일에 조직된 16명의 민립대학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 민립대학 후원회 취지서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계몽 운동의 제일선에 들어서 신문화 주의를 제창하고 미래 우리 자손의 정신적 운동의 토대를 닦으려는 가장 원대한 이상을 달하리라는 포부”를 가지고 “반만년 창유 문화를 계승하고 세계적 공통 문화를 집대성하여 우리 근역에 독특한 신문화를 건설하자는 철학적 운동”이었다. 

조득린은 1923년 7월 12일에 ‘프레지던트 클리브랜드’ 선편으로 북가주 윌리암스에 거류하던 박을성의 부인과 그녀의 두 자녀와 동반했다. 귀국 소식을 전한 신한민보는 그가 조선의 모 교회에서 청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1926년 샌프란시스코 입항 서류에는 그가 목사가 아니라 교사로 사역했고, 서울에서 거주했음을 밝힌다. 그의 서울 체류는 3년간이었다.

 

멘티카 한인교회

멘티카 한인교회 예배당, 1918년

조득린은 1926년 5월 4일에 상항에 도착했다. 그해 8월 19일에 상항에서 개최한 미국 남감리교 연회에서 그는 전도사 증명을 얻어 멘티카 한인교회를 섬긴다. 본 교회는 1920년 이후 4년간 모일 사람이 없어 폐쇄하였다가 1924년 7월 13일부터 다시 예배를 보기로 하고 25명이 모여 임정구 목사가 인도한 후 조득린 목사가 부임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민국 사건으로 1927년까지 약 1년간 목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5월 5일자 신한민보에는 미국 이민국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사방으로 수색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민국에 따르면 작년에 입국할 때 그의 신분은 유학생이었는데 목회를 하고 있음을 안 이민국이 학교로 돌아가라고 누차 경고를 하였지만 계속 목회를 하고 있었다가 최근에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1931년 11월에 조득린은 중가주 리들리에서 별세한 김재순의 장례비로 50전을 기부하였다. 1942년 2월에 독립금으로 5원을 기부하던 그해 3월 1일에 개최한 나성 삼일정 경축 대전례에 그가 딜라노 대표로 참석했다. 

조득린은 1943년 4월 11일 상오에 향년 79세로 소천하였다. 2, 3주 전에 신병을 얻어 나성 공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부름에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후사가 적어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위하여 애석히 여겼다고 한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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