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48)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인쇄술 발달로 지식혁명 초래, 16세기 종교개혁 가능케

과학은 창조신비 발견 도구, 성경적 숙고 항상 동반돼야 

 

과학 

인류 역사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삶의 질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라는 예상 내지는 기대 속에서 살고 있다. ‘변화’가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된다. 과학자들은 사물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얻은 지식을 토대로 특정 원리를 체계화 한다. 또한 그 이론적 결과를 삶의 정황에 실제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연구를 걸치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이 과정을 걸치는 동안 수고한 자들에 의해 생겨난 산물을 누리게 된다. 

과학이 지닌 힘이 대단하다. 그렇다면 과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그 증거를 중세 말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은 중세의 짙은 어두움을 향해 비치는 강한 빛이 되었다. 

 

인쇄술 

산업혁명 및 르네상스와 함께 중세 말기에 찾아온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결정적으로 가속시킨 사건이 있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tenberg, 1398-1468)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발명이다. 그는 금세 공업으로 유명했던 마인츠(Mainz)의 하급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도 돈을 찍는 금속세공업에 종사하였기에, 글자를 금속에 새기는 방법에 익숙해 있었다. 그의 재능과 관심의 결과 세상을 바꿔놓는 인쇄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사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은 ‘인쇄술’ 자체가 아니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3세기부터 나무를 소재로 하는 ‘목판인쇄’가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금속활자도 이미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의 결정적 공헌은 어떤 것이었나? 한마디로 기계화된 인쇄술이다. 

그는 금속세공에 많은 경험을 지닌 자였다. 주형에 부어 활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한 뒤 작업에 들어갔다. 소문자 대문자 알파벳과 다양한 기호와 숫자 활자를 여러 벌 주조할 수 있는 주형을 만들었다. 주형의 바닥에 글자의 모형에 고정시킨 뒤, 녹인 합금을 부어 냉각시키면 글자의 모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포도주를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이용해 활자판을 눌러 인쇄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나아가서 여러 장의 인쇄물을 한 묶음으로 절단할 수 있는 주형틀도 생각해 냈다. 

 

지식 혁명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의 특징은 대량생산에 있었다. 특정 사상이 인쇄되어 유럽 전역에 속한 시간에 널리 퍼지면서 일종의 지식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나누길 갈망하던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촉진되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지식이 전달될 수 있게 되어, 중산층들에게 글을 배워 지식을 얻는 일에 열망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구텐베르크는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과학적 체계에 대한 이론이나 실제에 능한 자가 아니었다.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구텐베르크는 사업에 실패한 장인이었다. 1448년에 마인츠에서 자신의 인쇄소를 개업했지만, 투자자였던 요한 푸스트(Johann Fust, 1400-1466)에게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 법정소송에서 패소함으로 사업을 빼앗겨 파산하게 되었다. 다른 인쇄소를 세워 사업을 계속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과 의지를 통해 세상이 변화된 것이다. 특정인들의 소유물이었던 지식이 깔끔하게 인쇄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가 인쇄한 책의 서체는 주로 라틴어고딕체였다. 이는 수도사들이 성경을 복사할 때 사용하였던 서체였다. 항상 성경출판을 마음에 두고 있던 그에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성경은 오직 소수의 소유물이었다. 평신도들의 손에 성경을 허락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교회의 자세 이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오직 교회와 수도원에 비치하였던 것은 성경 한 권의 가격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텐베르크는 필사본과 버금가는 기술을 통해 아름다운 고딕문자 성경을 출판하여 싼 값에 공급하려 한 것이다. 

결국 1455년에 그의 꿈이 현실로 이뤄졌다. ‘구텐베르크 성경’ 또는 ‘42줄 성경’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인쇄본 성경이 완성된 것이다. 전체 2권에 1,282쪽의 분량으로 3년에 걸쳐 180부를 인쇄하였다.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게 하였던 지식의 대중화의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점차 성경의 대중화를 통하여 성경의 지식이 교회의 특권층을 넘게 되었다. 일반인들도 성경을 알고 소유하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향후 16세기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던 중요한 역할 중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학과 신앙 

분명히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중세 말에 발명된 활판 인쇄술은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과학은 항상 우리 신앙에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과학과 신앙은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어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심지어 과학과 신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매우 곤란한 입장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공교육은 성경의 진리와 전혀 다른 사실이 근거하여 교육한다. 생물 교과서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친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며, 인간의 존재도 단세포로부터 출발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분명하게 믿는 신앙인이라면 생물 시험문제에 답을 작성하기 전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과학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신앙의 진리를 도전하거나 나아가서 파괴하기도 한다. 실상 과학적 사고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계몽주의를 주도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철학과 함께 인간을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신의 간섭을 거부하는 이신론(Deism)이 생겨난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신앙 

신앙은 결코 강요될 수 없다. 반드시 특정한 신앙 체계 또는 대상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동의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중세시대는 개인의 신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향력 아래에서 태어나서 자라나 생활하다가 죽는 것이 일반적인 삶이었다. 개인 신앙의 바탕이 되는 진리의 내용보다, 각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충분자격조건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도전하지 않는 것이었다.  

중세 말기를 맞아 과학이 발전하면서 서서히 세상이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였다. 절대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억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기에 자연히 천동설을 받아들였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주전 100-170)의 이론이었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란 것은 매우 보편적인 진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지동설을 들고 나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는 학설을 주장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결코 교회를 향해 반기를 들려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그는 가톨릭 교구 운영위원회 회원이었던 삼촌의 도움으로 가톨릭 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았다. 1491년에는 저명한 크라쿠프대학에 등록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접하였으며 수학, 천문학, 기하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때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성직자가 되기 위해 1495년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1503년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은 뒤 참사원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당의 미사를 계획하고 건물을 관리하는 일에 충실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란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과학적 신념과 신앙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해 논하는 경우가 있다. 그가 과학적 사고를 무시하는 중세교회를 향해 도전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묘사하려한다. 물론 중세교회와 함께 그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가 매우 이론적인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 유행하던 천동설로부터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코페르쿠스의 지동설은 향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454- 1642) 등에 의해 발전되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 결과 과학적 신념이 신앙을 배격하는 형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중세교회가 지나친 권력을 지녔던 사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를 포함하여, 교회는 과학조차 무시한 채 신앙교리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화론이 그렇듯이 과학적 신념 역시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과학과 신앙은 결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숙지하는 것을 신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신앙은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 과학은 창조의 신비를 발견하는 도구이다. 교회는 과학의 영역에 무지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세상을 향한 영향력의 방법과 내용에 대하여 성경적 숙고가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10/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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