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44)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르네상스, 변화 수용 사회로 전환 역할로 종교개혁 원동력 됐지만

인간중심 사고 제어능력은 없어져...성경진리를 유일기준으로 해야

 

변화와 변질

요즈음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얼마든지 수용되는 사회가 되었다. 새로운 것들에 대한 반감보다 기대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중세시대를 돌이켜보자. 그 사회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 중심에 전통을 중시하던 교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곧 정통에 대한 거부와 반역이라고 여겨졌다. 교회의 개혁에 대한 생각을 지닌 자들을 결코 묵인할 수 없었다.  

중세 말기의 르네상스가 16세기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변화를 수용하는 사회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중세교회의 장악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결국 그토록 견고하던 중세교회가 서서히 무너졌다. 변화를 거부하던 그들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영적으로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를 중시하며 변화를 추구하였던 르네상스의 정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르네상스는 변화를 거부하던 중세교회의 개혁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능력을 중세교회는 세속적 사상의 도전을 물리치지 못한 채 더욱 깊은 타락의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16세기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로부터 개혁을 수용하는 사회로의 전환이란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 중심의 세속적 사상을 대항하여 싸워야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한 사람 

역사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널리 알려지고 틀이 잡힌 사상과 문화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반드시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 있다. 역사의 틀과 흐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중세 르네상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꽃을 피운 르네상스의 문을 연 장본인은 누구일까? 그는 매우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평민 집안에서 흑수저를 물고 태어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e Bicci de’Medici, 1360-1429)이다. 그가 갑자기 등장해서 학문과 예술의 진흥을 위한 후원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를 넘어 18세기까지 긴 세월동안 유럽 전체에 족적을 남긴 ‘메디치 가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자이다.  

조반니는 로마에서 삼촌이 운영하던 은행을 인수하여 2년 뒤인 1397년에 플로렌스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이미 상공인들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이 아니었다. 고객을 중시하며 주어진 일을 신중하게 수행하였고, 사회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었다. 

그가 유럽 금융계의 실세가 되었다. 교회의 막대한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고객이었던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a)가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던 교황이 지불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출해 준 것을 계기로 신용을 얻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이 되어 특권을 누리며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은 물론 그 너머에 도처로 약진하였다.  

 

한 가문 

조반니가 1429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 1389-1464)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생전에 부친으로부터 체득한 은행업에 관계된 영업기술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사업이 유럽전역으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투옥되고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다. 평상시 그를 제거하려던 자들이 음모를 꾸민 것이다. 

그러나 전화위복이 되어 이 사건으로 메디치 가문의 입지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코시모가 망명생활을 마치고 다시 플로렌스에 돌아오자 그를 열열이 영한 시민들은 1년 뒤 그를 베네치아의 통치자로 선출했다. 남다른 정치적 감각을 지녔던 그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치적 도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시 검소하게 살았으며 관용을 중시하였다.  

코시모를 통해 르네상스의 급격한 발전이 이뤄졌다. 특히 그로 인하여 ‘플라톤 아카데미’와 ‘메디치 도서관’이 세워졌다. 잠시 후에 살펴볼 ‘플라톤 아카데미’는 르네상스 인문학자들의 실제적 산실이 되었다. 나아가서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데디치 도서관’은 르네상스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플로렌스의 위상을 세우는 일과 르네상스의 진보에 크게 기여하고 사망한 코시모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 피에로 데메디치(Piero de’Medici, 1416-1469)가 가문을 이어갔다. 불행하게도 그는 지병으로 인하여 5년 만에 사망하였으나, 남달리 조숙하였던 피에로의 장남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Meici, 1449-1492)가 약관 20살에 무거운 짐을 맡았음에도 업적을 남겼다.  

로렌조는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나 그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조부 코시모가 설립한 ‘플라톤 아카데미’를 책임지고 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에게 직접 개인교수를 받았다. 로렌조가 23년간 플로렌스를 통치하는 동안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나폴리와 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위기를 평화협정으로 마감시키는 등의 업적을 통해 시민들의 칭송과 존경을 한 몸에 안았다. 나아가서 메디치 가문의 관심거리였던 학문과 예술 분야에 대한 실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플라톤 아카데미’의 역할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르네상스 인문학자들이 마음껏 학문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메디치 도서관에 소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적 구심점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메디치 가문은 지속적으로 유럽에서 재력과 정치력을 함께 구사하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가문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나아가서 중세교회를 마감하고 종교개혁이 열려지는 시기에 메디치 가문이 교회의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로렌조의 차남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Medici, 1475-1521)는 향후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한 면죄부 반포를 승인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개혁자 마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Medici, 1478-1534)는 로렌조의 조카이다. 태어나기 전에 부친이 암살을 당하였고 곧 이어 어머니까지 잃은 뒤 고아가 된 그는 백부 로렌조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에게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줄리오의 사촌인 조반니가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된 뒤에 교황청의 실세가 된 것이다. 그는 1523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하였다. 이외에도 메디치 가문은 유럽의 각 나라의 왕실과 결혼을 통하여 관계를 맺고 장시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 정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 1304-1374)로부터 시작된 인간 중심의 사고가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지오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에 의해 지속되었다. ‘데카메론(Decameron)’의 저술가로 알려진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소설가이며 시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라틴 고전을 사랑하던 보카치오가 고대 작품을 읽기 위해 헬라어를 독학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플로렌스 대학교에 헬라어 강좌가 개설되었고, 향후 고전 문명과 모슬렘 학문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 서방교회로 넘어온 헬라 교사들을 통해 헬라어 연구가 보다 활발해질 수 있었다.  

헬라의 지식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고대철학자 플라톤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상되었다. 그 중심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플로렌스를 통치하던 중 1439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사이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서로 대적관계에 있던 동서교회가 한 자리에 할 수 있도록, 코스모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다. 이때 코스모와 플로렌스의 지식인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 학자 게오르기우스 게미스투스(Georgius Gemistus, 1355-1452)의 플라톤 철학 강연에 열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플라톤에 대한 열정을 가진 자들이 코시모의 장려와 후원 속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1459년부터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본격적으로 플라톤주의에 대해 가르쳤다.  결국 1462년에 ‘플라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지속적인 지원이 있었으며, 그들도 피치노와 그의 제자들에게 르네상스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 피치노는 플라톤에 매료된 자로서 모든 면에 그를 모방하려고 하였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 번째 플라톤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럽게 ‘플라톤 형제회’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철학, 신학, 의학, 문헌학, 법학, 정치학 등 다양한 주제를 선정해 함께 토론하였다. 

이들은 피치노가 추구했던 정신을 공유하였다. 그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사상에 맞추려는 시도였다. 그는 플라톤사상에 근거한 기독교적 영성을 지닌 기독교 국가를 꿈꾸고 있었다. 그 핵심은 사랑에 근거한 정치적 공동체였다. 이것이 피치노가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랑 철학’사상이다. ‘플라톤 형제회’ 역시 사랑의 원리에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개인과 집합체의 행복에 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철학적 사랑을 인간의 영적 개념에 연결시킨 것이다.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인간중심의 사고를 중시하는 것이다. 피치노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향후 메디치 가문에 속한 자들도 공유하였다. 이들 모두 자신들이 고대 플라톤주의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헬라 문화와 기독교 사상의 일치를 위해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성경의 진리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인간 중심의 사상을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1522년에 마감되었다. 줄리오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하기 전 플로렌스의 대주교로 있을 때, 많은 회원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것이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메디치가 업적이 메디치가의 일원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변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변화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의 진리를 유일한 기준으로 하여 반성하는 자세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변화를 거부하면 변질되는 것은 영적인 힘을 잃은 교회에게 안겨지는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현재도 과거와 동일하다.  

covenantcho@yahoo.com

 

09.1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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