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43)

르네상스 중심에는 ‘휴머니즘’ 즉 ‘인문주의’ 있어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인간 중심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성경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윤회설을 거부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 유사한 일이 반복적으로 생기는 사실은 인정한다. 구약 역사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좋은 실례가 될 수 있다. 이전 역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아 등장하는 사람들에게서 과거 조상들의 관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인간의 부패가 지닌 심각성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을 증오하고 구속을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욕망이 인간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 각 시대마다 표현된 모습은 다를지라도, 결국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아담의 태도가 역사의 순환 속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통과 세속적 힘이 지나치게 중요시되면서 하나님의 관심과 전혀 다른 방향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인간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이 세상에서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을 상실하게 하였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는 중세시대의 막을 내리는 역할과 함께 16세기 종교개혁의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인문주의가 있다. 즉, 르네상스는 과거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꽃을 피운 인간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시대적 운동이었다. 

르네상스의 중심에는 ‘휴머니즘’ 즉 ‘인문주의’가 있었다. 어원적으로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다. 인간을 근본으로 한다는 표현이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을 자체 또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이룬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문주의란 특정한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휴머니스트 사이에 발견되는 독특한 이념이었다. 그들은 학술, 문화, 교육 운동을 주도하면서 고전적 맥락에서 재발견한 인문주의가 지닌 가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중세시대에 대학에서 가르쳤던 법학, 신학, 의학과 같은 전통적 학과가 다루지 않았던 중요한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자율성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가 지녔던 고민의 핵심과 유사하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세계를 구성하는 원질과 운행의 원리를 밝혀내는 자연철학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일관성이 결여된 채로 현상을 넘는 실재에 대해 동일성을 탐구하는 것을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 대신 소크라테스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삶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 올바른 삶의 방향에 관한 지식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쏟았다. 즉 인간의 행위와 삶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중세교회가 지녔던 핵심적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교회가 영적 기능을 사실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지켜온 전통과 의식은 하나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즉 개혁이 필요할 정도로 심히 타락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상태는 아니었다. 신학이 스콜라철학과 접목되어 중세말기에는 추상적이며 사색적인 학문으로 전락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의 무게를 더욱 중시하였던 중세말기 신학자들도 아직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란 울타리를 안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의 원동력이었던 인문주의에서 발견되는 ‘인간 중심’은 매우 다르다. 르네상스는 인간성 해방을 위한 혁신운동이었다. 그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행된 교육이 지녔던 삶의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헬라인은 자신이 가치 척도의 기준이라고 확신했다. 자율성은 교육의 목적, 또는 교육을 통한 완성된 인간의 목표였다. 

르네상스인의 자극했던 고전적 인문주의가 추구했던 인간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교육과 훈련을 통해 소위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갖춘 인간을 말한다. 육체적으로 성숙할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정신적 능력을 갖춘 인간을 이상형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특정한 기술에 능통한 것보다 도덕성을 중요시 여기는 이상적 기준에 만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키케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가장 우상시 하였던 인물이 있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병합을 시도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이다. 헬라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여러 학파들 사이에 치열한 철학논쟁이 벌어지던 시대에, 키케로가 혜성같이 나타나 로마와 헬레니즘이 복합된 ‘고전 인문주의’를 정리한 것이다. 

키케로가 기원전 62년에 저술한 ‘시인 아르키아스를 변호하여’라는 연설문을 잠시 살펴보자. 위에 언급한 헬라 사회의 ‘인간중심’의 교육을 지칭하는 ‘파이데이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을 이 연설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와 친숙한 영어 단어인 휴머니즘 (humanism)과 유사한 ‘후마니타스(humanitas)’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를 열어준 강력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키케로가 원했던 것은, ‘후마니타스’를 통해 로마시민들이 전인격적인 모습을 갖추는 것이었다. 특별한 기술에 뛰어난 인재보다 이상적인 인간성을 갖춘 사람의 모습을 중시하였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에 공통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끄는 사회를 추구한 것이다. 직업이 달라도 인간답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회구성원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고 확신하였다. 이것이 르네상스시대의 정신의 기초인 인문주의가 지닌 특성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아는 것을 삶 속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흥이 근대적 가치를 지니고 새롭게 나타난 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였다.  

 

페트라르카 

 

그렇다면 르네상스의 시작 인물은 누구일까? 이미 앞서 소개한 ‘신곡’의 저자 단테 (1265-1321)를 먼저 생각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거침없는 ‘인간중심’의 사고가 파격적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중심’의 사상을 지닌 자가 아니었다. 도리어 ‘하나님중심’과 ‘인간중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물로 분류될 수 있다.  

진정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인물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 1304-1374)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키케로를 자신의 부친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고대 인문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1345년 키케로의 서한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키케로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게 편지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겼다. 로마의 시인 이었던 베르길리우스(Vergilius, 70-19 BC)를 형제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약 15세기라는 시간적 공간을 뛰어 넘어 고대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출발지인 피렌체(Firenze, 영어표기 Florence) 출신이다. 단체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가 1302년에 정치적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페트라르카는 부친을 따라 이사를 다녔다. 그러던 중 교황청이 있었던 프랑스 아비뇽에 가까운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부친의 요구에 따라 몽펠리에와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부친의 사망 후 인문주의 학자 및 작가가 되었다. 

단테에 이어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서정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는 그의 대표작로서, 평생 짝사랑했던 라우라에게 바친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녀는 1384년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한다. 그녀의 생전과 생후로 나눌 수 있는 이 작품은 한 여인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자연과 고전을 인용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암흑기 

 

페트라르카의 다른 특징은 그가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처음 구입하여 읽었던 책이 어거스틴의 ’신국론‘이었다. ’나의 비밀‘이란 책에서는 어거스틴과 가상대화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페트라르카는 분명 중세 가톨릭교회에 속한 신앙인이었다. 단지 어거스틴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던 만큼 신앙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세속적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2명의 사생아를 낳기도 하였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정결한 삶을 강조하였던 어거스틴의 교훈이 그에게 갈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고대 로마 인문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로마고전과 기독교가 상충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글에 로마시대 인물의 글과 로마신화를 인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중세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로마시대에 비해 중세시대의 문명수준이 짙은 어둠속에 잠겨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로마의 인문주의 사상이었다. 그는 고대문학에 대한 도서를 수집하였다. 수많은 책들을 편집하고 번역하였다. 그에게 확신이 있었다. 고대 인문주의자들이 지녔던 신념에 동참하는 것이, 곧 중세의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중세 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인간중심‘의 사고가 새롭게 소개되었다. 

페트라르카는 실용적인 사람이었으나, 결코 종교적이지 않았다. ‘인간중심’의 사상과 작품을 통하여 명성과 행운을 취하려는데 목말라하던 자였다. 중세교회에 몸담고 있었으나 자신의 죄에 대하여 몰두하는 것을 소모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세속적 교인이었다. 그는 결국 향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모범이 되고 말았다.  

covenantcho@yahoo.com

08.3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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