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38)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중세교회의 대개혁운동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 그레고리 7세(1015-1085)를 중심으로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대개혁운동을 단행하였다. 교회가 세속 권력에 종속된 상황 속에서 교회의 자율성 확보가 그 중심에 있었다. 교황권이 확립되면서 중세시대의 출범과 함께 지속되던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이 종식된 것이다. 세속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함으로서, 대외적 교권의 회복은 물론 교회 내적으로는 교황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가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가장 강력한 중세 교황으로 알려진 이노센티우스 3세(1160-1216)에 의해 교회가 재정립되었다. 특히 1215년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선포된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라는 교령은 교회 안에 통일된 질서를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표현되기도 하였다. 현재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자들은 이 교령을 교회의 쇄신 또는 개혁이라 표현하지만 실상은 교황권의 확대 적용을 위한 방편이었음에 분명하다.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면, 교회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규정하려는 교황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및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설, 필리오케, 악의 존재, 최후의 심판 등과 같이 초대교회 이후 기본 교리로 자리 잡은 내용이 정리되었다. 그 뿐 아니라 향후 종교개혁자들이 반기를 들었던 화체설과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성직자의 권한 등도 포함되었다. 

이 교령에 담긴 진리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곳에 포함되지 않은 진리에 대해서는 무조건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노센티우스 3세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교회 안에 통일적 질서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세움으로, 교황청을 정점으로 각 교구에 속한 성도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의 위상 

 

교황권의 신장으로 인해 성직자의 위상이 덩달아 높아지게 되었다. 물론 모든 성직자들은 교황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제 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모든 로마가톨릭 신자는 반드시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신부와 1년에 한번 대면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와 부활절에 성찬에 참가하여 영성체를 받는 일이었다. 성직자는 이 기회를 통해 각 개인의 교리지식을 점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앙의 기본과 특히 죄가 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려 하였다.  

중세교회의 신자들은 일생동안 성직자의 관계를 맺어야 했다. 처음 태어난 뒤에는 세례를 받고, 조금 성장하여 5-7세가 되면 세례 시 맹세한 내용을 확인하는 견진성사, 결혼할 때에는 혼배성사,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연옥에 들어갈 것을 확인하는 종부성사가 그리하였다. 그러나 1년에 한번 반드시 성직자를 대면하여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받는 일로 인한 영향력이 가장 컸다. 특히 성찬식을 주도하는 성직자의 축성과 함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에 근거하여, 성도들은 성직자들을 우러러 보게 된 것이다.  

교구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관할을 맡아 관리하는 책임과 권리가 동시에 주어졌다. 시간을 내어 성도를 돌아보는 심방사역이 성직자의 의무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각 교회를 맡은 성직자들이 주어진 임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교 또는 주교 대리가 직접 순회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중세교회 신도의 정체성이 교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교구를 잘 운영하는 것은, 곧 교회를 안정시키는 지름길이었다. 성도와 성직자 사이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 이를 잘 해결하고, 지속적으로 성도들에게 교회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성직자는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놓여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교회의 방침을 전달하고 교육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실천적인 내용을 설교하였다. 나아가서 그들에게는 세속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모습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라틴어와 성경의 문법적 이해 등 교회가 세워놓은 기준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중간계급 출신들이 주를 이뤘던 성직자 후보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많이 미달된 상태로 성직을 받았다. 

성직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한 가지는, 성도들이 건전한 교리를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교회 전체를 통일된 교리로 묶어 공동체를 이루려는 시도에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단의 출현이었다. 교회는 이들에 대해 반드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단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색출하고 재판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임무 역시 기본적으로 성직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12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파가 영향력을 확대한 것을 계기로,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이단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이단자에 대한 칙령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에 의해 공식적 종교재판법이 출범하였다. 향후 종교재판에 근간이 된 법령이었다. 이단 판별과 심문에 대해서 주교들에게 권한이 주어졌다. 각 주교들은 자신들의 교구 안에 이단이 있는 가를 살핀다는 기본적인 임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법권과 처벌권은 교회가 아닌 세속 권한에 속한 것이었다.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세속 법정에 넘겨주고, 다시 되돌아간 이단자는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도록 하게 하였다. 세속 영주들이 종교재판을 걸쳐 죄가 판명된 자들을 처벌하는 부분을 담당한 것이다.  

이단자에 대한 루시우스 3세의 칙령을 부분적으로 소개하도록 하자. 

“최근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는 이단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가톨릭교회에게 위임된 힘을 일깨우는 동시에 황제권의 지원을 받아 거짓된 목적을 가진 이단의 오만과 후안무치를 박멸하고, 거룩한 교회에 밝게 비치는 가톨릭의 단순성의 진리를 이단의 거짓 교리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순수하고 자유스럽게 발현하기 위함이다.” 

“해당 이단을 받아들이거나 옹호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에게 호의나 정신적 지지를 나태 내어 위로하거나, 믿거나 완전하게 하는 등 그 명칭이 어떠하든지 이단을 강화시키는 자들, 혹은 미신적인 명령으로든 자신을 위장하는 자에게는 동일한 처벌을 선언한다.” 

“앞에서 말한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유죄로 판명된 평신도는 그 이단을 철회하고 즉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속 재판관의 판결에 맡겨서 그 죄질에 상응하는 타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을 선언한다.” 

“그들의 이단을 철회하거나 가톨릭 주교 앞에서 조사를 받아 자신을 깨끗이 한 후에 자신이 철회한 이단으로 돌아간 자들은 어떤 심리도 하지 않고 세속 당국에 인도되며, 그들의 재산은 가톨릭교회가 사용하기 위해 몰수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 칙령의 대부분은 1215년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문화되었다. 종교재판이 공식적으로 중단된 것은 1834년이었다. 긴 세월동안 교회와 국가의 야합 속에서 엄청 많은 수의 성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종교재판 

 

종교재판은 이단에 대한 교회의 자연스런 반응으로 생겨났다. 통일된 질서를 추구하던 교회를 방해하던 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말살시켜야 한다는 매우 인간적인 사명감이 발동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통해 이단의 출현과 이에 대한 교회의 대처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거의 12세기가 지난 뒤 신명기 13장, 출애굽기 22장,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등 성경에 근거하여 이단을 죽여도 무방하다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인간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묵인하였다. 목적만 달성될 수 있다면 어떤 행위도 가능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실천하였으나, 그 누구도 그들의 독주를 막을 길이 없었다.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존재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등한시 하게 되었다. 이미 막강한 힘을 지닌 교회에 교황의 권한이 신장되었다. 그러나 더욱 통제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그 힘이 남용되었다. 루시우스 3세의 칙령에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이단의 재산 몰수를 법에 명시함으로서 향후 종교 재판이 남용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곧 종교재판이 확산되었다. 주교가 실시하던 심문을, 교황이 직접 임명한 전문성을 지닌 종교재판관이 맡게 되었다. 그들은 각지를 돌면서 매우 엄격하게 재판을 실시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교황이 도미니크, 프란체스코 탁발수도회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1217년, 도미티크가 처음 탁발수도회를 창설하였을 때, 청빈한 삶을 중요시하였다. 심지어 거지수도회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233년부터 이들이 종교재판의 법정 운영을 맡았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거리의 설교자로 복음적 삶의 형태를 선택하였던 프란체스코수도회도 같은 뜻을 가지고 합세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탁발수도회의 세속화와 함께,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교회의 권위에 편승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적상태로서는 힘과 부를 가져다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종교재판은 영적 어둠에 잠긴 중세교회의 산물이다. 그러나 종교재판관들의 횡포는 종교개혁 운동과 개혁가들의 거침돌이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사명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covenantcho@yahoo.com

 

06.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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