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위클리프와 롤라드
존 위클리프(1320-1384)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학자였다. 영적 어둠에 잠긴 중세교회의 오류를 분명하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요구하며 외쳤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은 선구자였다.
어떻게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 그는 캔터베리대학의 학장까지 지낸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가난한 설교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였던 활동가였다. 중세로마교회는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384년에 위클리프가 사망한 뒤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이 지속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자들을 ‘롤라드’(Lollard)라고 부른다. ‘롤라드’라는 단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화란어 단어 중 ‘중얼거리는 자’를 의미하는 명사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독일 남부에서 사용되던 단어 중 ‘자장가’를 의미하는 룰렌(lullen) 또는 아인룰렌(einlullen)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아무쪼록 이 호칭은 상대를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롤라드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무척 다양했다.
초기 롤라드에 속한 자들은 기본적으로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을 충실하게 따랐다. 특히 초기 지도자들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나 학문적으로 위클리프에 미치지 못했기에 주로 그의 사상에 호소하였다. 추종자들이 증가되면서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형태의 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전기와 후기
롤라드와 기존 성직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성찬의 본질 및 성상과 성인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1394년 롤라드는 세력을 규합하여 ‘열두 가지 결론서’라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문서에는 로마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재차 주장한다기보다 더욱 발전시켜 더욱 타락의 길로 치닫던 로마교회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로마교회 역시 이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전보다 더욱 가혹한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401년 의회는 이단을 화형에 처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가 지속되던 영국교회사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교회가 롤라드를 이단으로 정죄한 상황에서, 사상을 철회한 자들에게는 대가를 지불하는 유혹의 손길도 있었다. 개혁적 마인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나아가서 순교에 대한 각오까지 요구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롤라드 운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전기는,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철회한 시기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필립 레핑던(Philip Repygdon)은 추기경의 자리를 얻었다. 나아가서 롤라드를 박해하는 앞잡이가 되었다.
설교자로 명성을 날리던 존 애쉬튼은 로마교회의 성찬론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였다. 교회는 그에게 옥스퍼드에서 강의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로마에 항소한 뒤 2년간 옥살이를 하였던 니콜라스 헤리퍼드는 탈출 뒤 영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체포된 그는 교회로부터 결국 카르트지오회 수사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철회하며 무너지는 상황은 롤라드운동을 총체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교회는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매사를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15세기 초에 옥스퍼드 대학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까지는 위클리프의 사상이 전수되었으나, 대학 평의회를 통해 엄격한 규율을 제정하고 학생들을 통제하였다. 매달 학생들을 조사하게 하다가 아예 1411년부터는 롤라드 사상을 가진 학생의 입학을 거부하게 하였다. 롤라드 운동의 중요한 중심축을 상실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개혁을 외치던 롤라드 운동이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였다.
후기 롤라드 운동이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환란과 연단을 통하여 정금같이 보다 소중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는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귀한 진리이다. 롤라드 운동에 생명력이 더하게 되었다. 교회의 개혁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숭고한 신앙인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첫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윌리엄 소우트리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설교를 통해 롤라드 사상을 전파하였다. 화체설에 반대하고 성상과 성지순례의 오류를 지적하는 내용을 당당하게 외쳤다. 1401년 성 베드로 성당 참사회에 소환되어 장시간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을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말이 무척 마음에 다가온다. “나는 그리스도가 고난당한 그 십자가를 숭배하는 대신에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그리스도를 숭배한다.”
롤라드 운동의 지도자였던 하원 위원 존 올드캐슬은 자신의 사상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결국 그도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구출하려는 계획을 꾸미게 되었는데, 이에 관계된 수십 명의 롤라드가 교수형에 당하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롤라드 순교자들의 수가 많아졌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작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교회는 자신들의 변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신앙의 행위라는 명목으로 줄곧 악한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가 시작한 개혁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 시기까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롤라드의 사상
롤라드는 성경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개혁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들은 모국어로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였다. 성경이 지시하는 범위 안에서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롤라드의 사상이 상황과 시기로 인해 조금은 다를 수 있어도, 공통적으로 성경만 합법적이며 유효한 교리의 근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로서 혹자는 이들을 청교도 사상의 뿌리로 간주하기도 한다.
위클리프가 롤라드에게 전해준 가장 중요한 사상은 성경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위클리프의 사상이 롤라드를 통해 계승하거나 발전시켰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입장에서 롤라드를 줄곧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도 위클리프의 중심 개혁사상이었던 성찬에 대하여 화체설에 반대하였다. 사제가 기도를 한 뒤에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위클리프는 물론 16세기 개혁자들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들이 고해성사에 반기를 든 이유는, 성직자가 사죄선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도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임을 자명하게 주장한 바 있다. 이외에도 연옥과 면죄부 등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나아가서 교회의 재산과 권한 및 권력의 남용을 지적하면서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사상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롤라드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발전시킨 예를 들어보자. 성상과 성지순례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극단적이지 않았다. 그는 성상이 올바르게 사용되면 글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지녔다. 성지순례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신학적 토의가 없었다. 그러나 롤라드는 성상을 매우 단호하게 배격하였으며, 일부 롤라드파는 성상파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성지순례 역시 성지순례라는 제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불경스러운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도리어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 정당한 순례라고 하였다.
성경적 개혁
롤라드의 기본사상은 16세기 개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롤라드가 위클리프와 16세기 종교개혁을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위클리프의 교훈대로 성경에 근거하여 사상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롤라드가 핍박과 순교를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 자체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위클리프, 롤라드, 16세기 개혁자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소중한 교훈이 있다. 개혁은 투쟁 또는 혁명과 다르다.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거나 커다란 목소리를 지닌 자들의 주장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에 마음의 고개를 숙이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결단이, 지속적으로 개혁적 마인드를 유지하고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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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