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중세의 이단
과연 마녀가 실제 인물일까? 코가 고부라지고, 허름한 검은색 옷을 입고, 흉한 이빨을 보이며 흉한 웃음을 지으며, 지팡이를 타고 나니는 여인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만난 본적이 있는가? 이 글의 독자들은 대부분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만화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답할 것이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을 하였을까? 시기적으로 12세기 전과 후의 답이 현저하게 달랐을 것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교회의 역할이 있었다. 이전에는 사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로부터 지닌 악한 힘을 공급받아 마법을 행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마법의 실재를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태도가 달라졌다. 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교회가 절대적인 권위를 앞에서 중세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전하고 방해할 수 있던 유일한 존재로 여겨진 것이 있었다. 바로 창조이후 줄곧 활동을 그치지 않았던 사탄이었다. 교회는 각 시대의 다양한 환경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이단을 통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교회의 입장에서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것은 곧 사탄의 활동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악마 숭배 및 마법과 연관되어 있는 자들을 악한 이단자로 간주하고 제거하는 일을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마법을 행하는 자들은 악마의 동반자라고 낙인찍고, 12세기에 합법적으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그들을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중세교회가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그토록 관심을 쏟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이 입혀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까? 역사가들의 답은 모두 부정적이다. 이미 그들은 영적은 힘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성직자들 사이에 도덕적 불감증이 만연되어있었고, 사치스럽고 호화스런 삶에 취하여 성직매매와 징세제도로 부를 축적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하며 개혁을 부르짖는 힘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중세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대상은 실상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의식화된 신앙행위와 제도를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교회를 대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임무를 감당할 것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실천하여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관심은 오직 절대적인 힘을 유지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교회의 권위를 도전하는 세력에 대하여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근절하겠다는 일념을 지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직이 강화되었고, 그 방법 역시 무자비해졌다. 이로서 이미 어둠에 잠긴 중세교회는 더욱 깊은 영적 수렁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세여성
중세교회에 나타난 커다란 변화는 여성들의 위치였다. 초대교회 이후 거의 10세기가 흐르는 동안 여성들의 활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억압 속에서 성도들이 영적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들이 교회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2세기 중세 사회 및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있었다. 항상 집에서 집안일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며 가축을 돌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종교적인 삶에 대한 동경이 증가하면서, 그 당시 유행하던 방랑 설교자들을 따르며 그들의 사역에 동참하는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중세교회의 입장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방관할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이단으로 간주하였던 카타리파와 왈도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여성들 때문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여성들의 동기는 매우 순수하였다. 사회로부터 괄시를 받거나 경제적 불만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중세교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영적인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왈도파는 16세기 종교개혁 전통과 연결된 유순하면서도 폭 넓게 전개된 개혁적 단체였다.
교회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이단에 가담하는 것 이외에도 여성들의 신비주의적 신앙으로 인하여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12세기 중반에 여성수도원을 찾는 성도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한 몸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적 교육을 받아 지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보다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에 관심을 지녔었다. 환상을 체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전해 듣는 것, 여러 상징들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 신비주의는 항상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관심을 가졌으나, 13세기 이후 스스로 고통을 받는 일에 몰두하게 되면서 위험한 경험을 종교적인 상식으로 승화시키려 하였다. 몇 가지 살펴보자. 그들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영적인 몰입이라고 간주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스런 계시를 받거나 초자연적인 예언능력을 얻고, 그를 찬양하고 그의 감미로운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을 사모하였다.
그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기고행과 수련을 예수의 육체적 고통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기, 피고름 마시기, 뜨거운 난로나 얼음이 가득한 물에 뛰어들기, 칼로 자해하기, 몸에 못질하기, 신체 일부를 절단하기, 극단적인 금식으로 굶어죽기,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대로 재현하기 등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신앙의 굳게 하는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중세 여성신비주의의 등장은 불행하게도 교회의 입장을 강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전통적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 안과 밖에서의 여성들의 영향력을 제어하려 하였다.
마녀 재판
교회의 입장에서 마녀는 새로운 이단이었다. 그러므로 13세기가 되어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실제로 마녀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주위에서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마녀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개인 또는 주위의 삶 속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마녀 때문이기에 누구든지 수상한 여인을 발견하면 즉각 고발하도록 하였다.
처음과 달리 세속 법정이 마녀재판을 담당하였다. 마녀로 지목된 여성의 재산을 몰수하고 재판과 관계된 도든 비용을 감당하도록 하게 하였다. 재판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는데, 유죄의 여부를 결정짓기 위하여 심문을 중심하는 진행하는 것이었다. 당사자에게 사실을 말하게 하고 참작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마녀라는 답을 얻어내기 위하여 잔인한 고문을 도입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로서 몸을 지지거나 물에 빠뜨렸다. 또한 눈물을 흘리게 강요하거나 바늘로 찌르게 하였다. 또한 뜨거운 불 위를 걷게 하였고, 목에 깔때기를 집어넣고 물을 계속 부었고, 다리를 고정시키고 큰 망치로 부수고, 머리에 조금씩 구멍을 냈고, 손을 뒤로 묶어 천장에 매달고 다리에 무거운 추를 달아매기도 하였다.
그 누구도 이런 고문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마녀라고 고백을 해야 중단될 수 있었다. 마녀사냥은 종교적 학살이었다. 수많은 여인들이 죽어갔다. 15세기 도미니크 수도사인 인스티토리스와 스프링거에 의해서 저술되었다고 알려진 ‘마녀의 망치’가 있다. 서문에 교황 8세가 1484년에 발표한 교서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바람’이란 내용을 싣고 있다. 마녀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중세교회가 어떻게 마녀 처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3가지이다. 1)물과 빵만 주고 피고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감금시켜 둔다. 2)약속한 대로 처형하지 않고 감금해 둔다. 그런 후에 처형한다. 3)담당재판관을 교체시킨다. 그리고 교체된 재판관이 사형을 선고한다.
중세시대 마녀재판은 결코 교회의 영적 순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끝까지 실추된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성도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할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선량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간 것이다. 나아가서 그 당시 교회가 경제구도의 변화와 기후 및 질병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때, 악마를 숭배하고 힘을 얻는 마녀들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이다
모진 고문 후 마녀들은 공개처형을 당했다. 옷을 벗겨 불에 태우는 과정은 많은 사람들의 유희거리가 되었다. 중세교회의 마녀재판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더욱 치밀하고 잔인한 방법을 선택하였다. 18세기에 가서야 점점 줄어들다가 끝나게 되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마녀사냥은 이 시대에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목적한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일삼았던 중세교회는 개혁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잊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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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