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중세교회의 상황 속에서
대중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를 향한 기대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강림과 함께 출발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상명령을 부여받았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 생명을 구하고, 구원을 얻는 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맡겨진 사명에는 충실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관심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한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세속적인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스콜라신학의 등장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고에 틀을 맞춘 신학이 발전할수록, 성도들의 영적성장을 위한 신학이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무미건조하고 사변적인 신학의 발전에 매료될수록 교회는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영적생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영적인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교회 안에서 자성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1216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미니크(Dominic Félix de Guzman, 1170-1221)가 도미니크수도회는 창설한 것이다. 도미니크는 복음전파에 힘을 쓰지 않고 무기력해져가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단과 회교도의 회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도미니크수도회는 설교를 통한 전도활동을 주된 사역으로 삼았다.
설교를 통해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몰두하는 수도사들이 모였으니, 자연적으로 ‘올바른 설교’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바른 지식을 토대로 설교하는 일을 마땅히 여기게 된 수도사들은 성경연구에 정열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도미니크수도회는 중세신학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13세기 중세교회는 1230년에 마감된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명목적으로 앞세워서 비 성경적인 행동을 일삼았던 십자군들로 횡포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나아가서 십자군으로 지원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의 수가 엄청 늘어난 상황에서 영적으로 무기력해진 교회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과 나
중세교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교회가 관심을 가졌어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돈독한 영적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출발한 수도원은 전통적으로 개인 경건에 가장 중점을 두어왔다. 그런데 설교를 통한 전도활동을 설립목적으로 삼았던 도미니크수도회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khart, 1260-1328)란 도미니크수도회 출신 수도사 등장하여 전과 다른 새로운 신학적 접근방법을 시도하였다. 에크하르트는 고타 근방 호흐하임에서 출생하여 15살에 에르푸르트에 소재한 도미니크수도회에 입단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일찍부터 에르푸르트 수도원장과 튀링겐 교구장에 임명받았으며, 파리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303년에는 삭소니 지방의 도미니크수도회 교구장을 맡아 사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에크하르트는 이미 보편화된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과 철학, 나아가서 교부들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그가 다른 수도사들과 달랐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 속에 시작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중시하는 신비주의 신학을 소개하였다.
그 당시 교회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이성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에 반하여, 에크하르트는 본질적으로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전제하는 신플라톤적 사고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신비주의의 틀 안에서 발전된 신학을 주창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그의 독특한 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다름 아닌 ‘하나님과 나’의 또는 ‘일치’이다. 에크하르트가 인간과 하나님의 ‘하나 됨’에 관심을 쏟았던 것은 그가 설교사역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수녀원에 속한 수녀들의 영적 보살핌에 대한 고민도 큰 역할을 했음에 분명하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신학은 광신적인 성향을 띤 것이 아니었다. 성경에 드러난 중요 주제를 자신이 세운 신비주의적 접근방식으로 풀어보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과의 합일은 철저한 자기 포기를 통하여 가능하고, 이때 참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의 신학을 옹호하던 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에크하르트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스콜라신학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매우 생소한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인간이 원래 하나님과 하나로 창조되었다는 신학적 이해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지만, 피조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합일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계신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다. 도리어 이미 창조와 함께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말한다.
비록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영혼에 자리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결코 그와 일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성으로 하나님의 원천에 다가가야 한다. 이 가능성은 창조된 인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이다. 이와 같이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상당히 거리가 먼 신학을 동반하였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였으며 신실한 목회자였다. 당연히 자신이 영적으로 돌보던 자들에게 드러난 자명한 영적 문제를 마땅히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동시대 교회로부터 지탄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버리고 떠나기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은 자신의 주장이 그 당시 영적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문제란 수도사들마저 자아에 사로잡혀서 외적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속마음은 극히 속화되었지만, 오직 겉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이 태어난 원래 모습은 가난한 것인데, 지성과 소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모순이란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이익과 정신적 만족에 안주하려는 이기심을 지적하였다. 나아가서 창조된 세계에 있는 것들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열거한 모든 문제의 근본을 ‘아집’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영적 문제의 뿌리를 자기 자신에 집착한 결과 본래 진정한 자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능한 회복된 자아를 위한 방법으로, ‘버리고 떠남’란 신비한 개념을 소개하였다.
‘버리고 떠남’은 ‘잘라내다’라는 중세 독일어 Abgeschiedenheit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 자기 집착을 포기하고 비워서 텅 빈 마음의 경지에 이른 상태를 ‘처녀의 경지’라고 설명하였다. 이 상태는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 즉 인간의 욕망이나 아집의 영향을 전혀 받지 곳에 거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든 조건을 구비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돌파’이다. 마치 알갱이가 밖으로 나오기 위해 껍질이 깨져야 하듯,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뚫고 하나님의 처소인 영혼의 근저로 진입한다. 그 결과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이다.
이단적 신비주의
예상대로 에크하르트는 교회법정에 고소당하였다. 그는 재판의 결과가 나오기 전인 1328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는 자신이 1329년에 발표한 교서에서 17개 항목은 분명하게 이단적이며 11개 항목은 이단성이 농후한 것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사상은 교회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가 비성경적인 신비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이다.
이 시대의 영적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교회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며 온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잘 유지해 나가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영적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고자하는 의욕이 앞선다고 해도 이단적 가르침을 허용할 수는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어느 시대 또는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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