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1)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2000년의 역사 그리스도의 탄생은 세계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원전(BC)와 기원후(AD)로 크게 구분된다. 매년 성탄절에 우리는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를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심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구원의 역사의 관점에서 성육신을 이해하는 성도들의 가슴은 남다르다. 그를 환영하며 열광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강림과 함께 지상교회가 탄생되었다. 초대교회는 사회적인 힘을 가지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던 소수로 시작되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작게 시작되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금방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매우 연약한 모습이었다.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제국의 황제들의 조직적인 박해를 출발점으로, 온갖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금방이라도 자취조차 없어질 것 같은 모진 억압과 박해 속에서, 정금보다 더 귀한 신앙의 열매가 맺어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이 지닌 능력이다.

2000년 동안 교회가 확장되었다. 그 비밀은 피의 복음 자체가 지닌 능력, 죄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과 의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에 있다. 200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역사의 중간에 나타난 뒤, 비틀거리면서도 오늘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종교들도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이 모든 것들의 출현과 도태, 그리고 횡포를 목격하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도전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과 자리를 지켜왔다. 기독교는 인간을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 인간이 중심에 있는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회의 역사의 독특성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분이시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걸어오며 남긴 모든 발자국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머리가 누구인가? 그리스도이시다. 아무리 그 규모가 대단하고 조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지 않았다면, 그 단체는 사람의 모임일 뿐이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신앙을 기준에서 섣불리 상대를 평가할 수 없다. 반면에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절대적 진리로 함께 공유해야 한다.

타산지석과 반면교사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건과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에 대한 평가, 그리고 한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이 다음 시대에 끼친 영향을 심도 있게 관찰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에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요, 한 시대의 일로 이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에덴동산에서의 범죄 이후로, 역사의 범주 안에서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이루어졌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위해 선택하신 도구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항상 붙잡고 계셨으며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의 연약과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고 도리어 부끄러운 발자취를 남겼음을 고백드릴 수밖에 없다. 출애굽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명하게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상이 득실거리는 애굽에서 구출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모시고 예배하며 살아가도록 강력한 구원의 손길로 그들을 해방시키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 광야 생활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비유하였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을 광야 생활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백성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었던 광야 생활 속에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 2000년의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 앞에 삶을 살았던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다.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죄로 얼룩진 사건들이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아무리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 왜곡시키고 미화시켜도 역사의 증거를 거부하고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기나긴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을 섭리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도 섭리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전하게 통치하시고 주장하신다는 교리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일 역시 그의 계획안에서 진행된다. 하나님 밖에서 이뤄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삶의 현장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당장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모두를 이끌고 가시지만, 피조물의 한계를 지닌 우리가 초월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즉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나간 일들 사건들을 통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너무도 분명하게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적인 기준의 잣대를 무효화 시킨다. 모든 인간은 성공과 실패, 거짓과 진실, 흥함과 쇠함, 확장과 축소, 그리고 승리와 패배 등은 판단하는 잣대를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는 어느 정도 객관화된 것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판단과 결론을 뛰어 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즉 흥망성쇠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역사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도록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2000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 부패한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하여 생겨난 불경건과 불신앙의 열매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화려한 부분 모두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중대한 유익이다.

중세교회 1000년

교회사를 공부하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된다. 특히 중세교회사에 대한 치우친 생각을 지우는 것이 쉽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신학교 시절 중세 교회사 공부를 마친 후 매우 유치한 생각을 가졌다. “왜 이런 것을 공부하지?” “내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1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벌어졌던 사건과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공부에 대해서 일종의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독자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자면, 처음 중세교회사 공부로부터 받았던 부정적인 첫인상을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공부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를 깨달으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기준으로 중세교회사를 바라보니, 1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일들이 줄지어 일어났으며, 지난 역사 자체를 바꿀 수 없는 무력감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난 2000년 동안 쉼이 없이 지속되었건만, 인간적인 역사관을 벗을 때 까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실망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흐르는 배경을 먼저 이해하여야 하기에, 그 기간을 마치 두부 토막을 내듯 자를 수 없다. 학자들마다 중세교회를 나누는 기준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인 그레고리 1세(Gregory the Great I, 540-604)가 즉위한 590년부터,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교회의 개혁을 공론화 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중세교회가 무려 1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중세교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곧 이어서 종교개혁자들의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구교와 신교를 갈라놓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신교의 초석을 놓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관점과 강조점이 달랐지만, 한 가지 분명하였던 것은 그들 모두 구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였다.

지난해 2017년,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마르틴 루터의 업적을 되새겼다. 개신교 성도들은 1년 내내 이와 관련된 글과 설교, 그리고 세미나 등을 통해서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중세교회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프란테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말이다. 그는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이전의 고전을 높이 평가하면서, 중세교회를 향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의 창조성을 억누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앞에 설명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세교회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새롭게 시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세교회의 1000년의 역사를 이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어느 시대나 흑암은 항상 공존하였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관점으로 중세교회의 흔적을 평가하여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하여, 복음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여야 한다.

독자들을 1000년이란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켰던 중세교회 역사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더러운 인간의 냄새가 코를 찌를 것이다. 이것이 교회냐고 반문하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걸쳐서 오늘의 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 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넘어질까 조심하는 경계심인 것을 잊지 말자.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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