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왕은 면류관을 쓴다. 찬란하고 호화로운 면류관을 쓰고 자신이 왕임을 한껏 드러낸다. 우리 예수님은 왕들 중의 왕, 진정한 왕이시다. 그래서 면류관을 쓰셨다. 얼마나 황홀한 면류관이실까. 그런데 잠깐.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은 그런 면류관이 아니었다. 아주 생소한 면류관이었다. 놀랍게도 가시로 만든 면류관. 가시는 찌르는 것이다. 가시는 고통이다. 그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시는 저주와 형벌의 상징이다. 예수님이 그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묵묵히 쓰신 이유가 있으시다. 찬송가에서 명백히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그렇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를 위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셨다.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철물점을 경영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주 이른 아침에 거칠게 생긴 로마 군인이 들어와 아주 커다랗고 뾰족한 못을 찾았다. 마침 한 구석에 처 받아둔 뾰족한 큰 못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녹슨 큰 못 세 개가 있어 내 보였다. 군인은 그것이면 되었다고 돈은 던지듯, 못은 빼앗듯 가져갔다. 철물점 주인은 안 팔리던 못을 팔게 되어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며 녹슨 세 개의 못을 가지고 뒤돌아가는 군인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그 녹슨 못을 무엇에 쓰려고 합니까?” 군인이 그 주인을 바라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를 못 박으려고 그런다. 왜? 뭐가 잘못됐어?” 철물점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 자기가 판 그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데 사용하려하다니. “이봐요, 군인양반. 안 됩니다. 내가 판 그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다고요? 그것만은 안 돼요. 돈은 여기 있으니 제발 그 못을 돌려주세요.” 군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가던 길을 갔다. “한 번 팔았으면 끝난 거지 뭘 물러달라는 거야!”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골고다 언덕에서 망치 소리가 철물점 주인의 귀에 들려왔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자기가 판 녹슨 못을 망치로 내리치는 소리였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그 철물점 주인의 가슴에 저미어 왔다. 그는 몸부림치며 외쳤다. “아아~~, 내가 저 못을 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짙은 상상(想像)의 이야기가 깊은 교훈(敎訓)을 준다.
이 땅에는 아직도 “영원”을 팔아 “잠시”를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영혼”을 팔아 “육체”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을 팔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거래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는 분이다. 언젠가 예수님을 값싸게 판자들이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며 벌벌 떨 날이 온다. “팔지 말아야 했는데----” 이런 후회의 탄식이 결코 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시관과 못, 왕이신 우리 예수님께 전혀 가당치 않는 것들이 그 머리를 찌르셨고 그 손과 발에 박히셨다. 골고다 언덕을 피로 적신 엄청난 광경이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의 왕을 피로 물들인 가시관과 못이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의 도구였다는 것을. 고난 주간이다. 찬양을 부른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 내셨네——”
03.23.2024